윤상원 이 땅의 하느님의 아들
1980년 5월 27일 이땅의 하느님의 아들 윤상원
1980년 5월 27일 새벽, 47개 대대 2만 317명으로 편성된 계엄군은 5개 방면을 통해 일제히 진입했다. 그 중 핵심은 역시 공수부대였다. 전남도청 등 목표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각 공수여단의 특공조들이었다. 전일빌딩과 YWCA를 장악한 것은 11공수여단이었다. 열흘 전 광주 시민들의 목숨 선 봉기를 유발한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했던 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접수했고 , 시민군 지도부가 모여 있던 전남 도청은 3 공수여단이 맡았다. 3공수여단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5월 27일 오전 4시경 전남도청에 도착, 후문을 넘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진입하여 1시간 21분만에 도청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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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청에는 157명의 시민군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승리의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남았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고아나 무연고자들이었다고 한다. "가족 없는 우리가 남을 테니 가족 있는 사람들은 가라"고 했다는 말도 전한다. 자칫하면 부랑자들의 난동 정도로 매도될 수 있는 '시민군'의 인적 구성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윤상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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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은행원 생활도 했던 그는 안온한 생활을 포기하고 광주로 돌아온다. '포기'했다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다. "양복 입고 어딘가에 출근하는 모습을 잠시나마 보여 드리는 것이 힘들게 대학 보내 주신 부모님께 대한 효도"라고 말했다고 하니 애초에 그는 그렇게 편안한 삶을 누릴 의사가 없었던 듯 하다. 이후 '대졸' 학력을 숨기고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윤상원은 공장지대 근처에서 노동자를 위한 '들불야학'을 운영하는 대학 후배들의 권유로 야학 강사를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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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의 짐승같은 진압이 이뤄진 뒤 자연스럽게 발생한 항쟁 열흘 내내 윤상원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와 그 동료들이 만든 '투사회보'는 모든 언론이 사라진 광주의 유일한 매체였고, 청년학생 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그는 외신 기자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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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그는 한국인으로 흔치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무장한 동료들의 허둥거림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침착함이 있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볼티모어 선 지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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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한국을 다시 찾은 마틴 기자는 더 구체적인 기억을 들려 주었다. 외신기자회견장에서, 윤상원이 마치 십자가상의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베풀던 예수님처럼 외신기자들을 스윽 훑어 보았다고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정지하는 느낌을 받는다. 브래들리 마틴이 볼티모어 선지에 기록한 바로 그 순간의 윤상원의 모습과 시선이었다. "정말 예수님을 보는거 같은" 느낌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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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의 예수님으로부터 어머니 마리아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은 요한처럼 그 역시 윤상원과 5.18 광주 항쟁을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극심한 감박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한다. 꿈에서조차 윤상원은 그때 그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 마틴을 괴롭혔다. "매일 폭음을 하고.. 인생을 힘들게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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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마틴 기자는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윤상원의 집까지 찾아가 윤상원의 아버지를 만났다. 일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윤석동과 일본 특파원을 역임했던 마틴은 서툰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마틴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윤상원이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사람들이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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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기자의 가슴에 그토록 고통스럽게, 그리고 깊숙하게 틀어박혔던 그 형형한 눈빛으로 27일의 캄캄한 새벽을 쏘아보던 윤상원의 마지막 모습은 평소의 그와도 달랐다고 한다. 도청을 함께 지켰던 동료 이양현의 말이다. "마치 5월 광주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판소리를 곧잘 하고 평소에는 그렇게 순박하고 소탈했던 사람이 그때 도청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니까요. 논리정연하고 단호하고 상황 판단도 빨랐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등학생들을 억지로 내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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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의 진입이 시작되기 전 윤상원은 그때껏 남아 있던 고등학생과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내몬다. "나가라.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여 내보낼 사람들을 내보낸 뒤 남은 사람들은 카빈총을 쥐고 예정된 최후를 기다린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도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했던 예수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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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이 들어오고 있고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며,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는 여성의 방송 소리의 말미에 드르륵 드르륵 M,16 소총 소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광주 도청 진입 작전이 전개됐고 끝까지 총을 놓지 않고 싸우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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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바지에는 전날 만났던 외신 기자들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보안사 요원이 찍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흡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누워 있다. 사망한 후 눕혀졌던 매트에 불 붙은 커튼이 떨어져서 불에 그을린 참혹한 모습이었다. 광주가 이 나라의 십자가였다면 그는 그 위에서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며 죽어간 목수의 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시 골고다 언덕을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 (김준태,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중) 말이다. 우리 역사에는 예수를 닮은 이들이 많다. 육신으로는 부활하지 못하였으되 수많은 청춘들의 결단과 노래 속에 부활한. 윤상원, 그도 그랬다.
역사에 많은 이들이 영웅의 칭호를 얻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희생해서 얻는 다는 점이죠. 그리고 그 희생의 결과가 자신을 향하지 않았을때 영웅이라 칭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 뵙는 성함이지만 진정한 영웅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여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역사를 지켰기 때문 아닐까 하네요.
오늘도 하나 배우고 갑니다.
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