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간첩단은 왜 생겨났나

in #kr6 years ago

지난 주 서승 선생의 <옥중 19년> 북 콘서트에 참석해서 본격적인 시작 전, 왜 재일교포들이 간첩으로 몰리게 됐나.....를 주제로 짧은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옮겨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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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간첩단은 왜 생겨났는가>

전쟁을 통해 분단은 철 가시 그득한 철옹성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온 국토가 석기 시대로 돌아간 북한이나 거의 망하기 직전에서 외국의 도움으로 죽다 살아난 남한이나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대단했죠, 그런데 전쟁 이후 70년대 말까지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남한에게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 외에 하나의 혹이 더 붙어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혹은 ‘열등감’이죠. 콤플렉스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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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북한을 눌러야 한다는 호승심이 하늘을 찔렀으나 북한보다 정치, 경제적으로 뒤처졌던 남한의 현실은 남한 정권과 국민들로 하여금 흡사 고슴도치 같은 방어 본능(?)을 발휘하게 만듭다. 90년대 이후 북한이 보여 준 바로 그 모습처럼 말이죠. 동시에 북한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조국 통일’을 위해 남한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을 음으로 양으로, 은밀하게 또는 대놓고 전개하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남한 정부가 북한에 취했던 자세처럼 말입니다

기실 남한의 상태는 불안했습니다. 체제 불만 세력이 해방 이후와 전쟁 기간 대거 남하하면서 상당 부분 사라진 북한 (우리 아버지 집안처럼 말입니다)에 비해 남한에는 보도연맹 등 대학살을 통해 이른바 씨를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연계되거나 구 좌익 세력과 연관된 사건들이 계속 발생했으니까요. 죽산 조봉암처럼 작심하고 옭아맨 경우도 있겠으나 (여기에도 양명산 같은 이중스파이로 의심되는 사람이 끼어 있습니다) 서울 시경 경무과장까지 지내다가 월북, 전쟁 후 남파돼 사업가로 활동하며 자유당 중진 영입 제의까지 받았던 김정제 사건이라든가 항공기 납북 사건, 세 가족 20여명이 여객선에 올라타고 그 배를 납치해서 북으로 가려던 경주호 사건 등이 무시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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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두번째가 주범 정회근

경주호 사건을 좀 더 말씀드리면 빨치산이나 부역 전력 때문에 징역형, 실직 등의 고초를 겪다가 더 이상 남한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세 명의 전직 교사들이 범인이었습니다. 제주로 가는 여객선이었기에 휴가 중인 장병들이 타고 있었고 그 가운데 두 명은 납치범들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선장의 기지로 납북은 모면했으나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여실히 엿볼 수 있는 사건일 겁니다. 북한도 (남한도 물론 그랬겠으나) 이에 부응하여 쉴새없이 공작원을 침투시킵니다. 통계만 놓고 보면 1950년대에 체포된 남파공작원이 1674명 1960년대 1686명으로 그 시기에 집중돼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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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KBS에서 <추적>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된바 있습니다. 간첩 잡는 대공요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 앞에는 “5.16 후 침투한 간첩들의 실화를 극화한 것”임을 강조하는 나레이션이 어김없이 깔렸죠. 유명한 ‘3대 혁명 역량 강화’ 즉, 북한의 혁명 기지화, 남한 내 혁명 역량 강화, 국제 혁명 역량 강화의 원칙이 공식화된 것은 1964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북한은 비슷한 얘기를 했었습니다. 1954년 11월 3일 김일성의 얘깁니다.

“남조선 인민들에게 꾸준히 우리 당의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미제와 이승만 역도를 반대하여 궐기하도록 해야 하며, 다른 방면으로는 북반부 민주기지를 더욱 철옹성 같이 강화해야 합니다. 또 세계평화옹호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국제적인 평화역량이 성장하고 평화운동이 강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조국통일 사업에 더욱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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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혁명 역량 강화를 위해서 북한은 부단히 남한 내 조직 역량을 키우고자 했고 베트남을 모범 삼아 아예 게릴라 부대를 대거 침투시켜 남한의 심장부를 타격하거나 지역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까지 합니다. 바로 1968년의 1.21 사태와 울진 삼척 지구 사건이죠. 서울 시내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강원도에선 이승복 소년이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시도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5-60년대에는 그래도 남파 공작원들이 연고지에 안착하거나 활동을 벌이는 것이 가능했는데 60년대 말쯤 되면 내려보내는 족족 남한 사람들의 신고나 방첩망에 걸려 체포됐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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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김신조

북한으로서도 밑지는 장사였습니다. 공작원 하나 양성하는데 꽤 많은 공과 비용이 들어가는데 너무 허무하게 망가지고 구멍 나고 자칫하면 조직들이 송두리째 고구마 넝쿨처럼 드러나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래서 북한은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대남 노선을 변경하게 됩니다.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채택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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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공세적으로 나와 분주히 공작원을 직접 파견할 때 함께 바빴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남한의 공안당국이었겠죠.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 보안과 등등이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한편으로 정권의 안보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 때려잡고 정치적 사건을 조작했던 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이 ‘공사다망’한 공안기관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활동의 베이스라 할 북한의 공작원 파견이 급감한 거죠. 한홍구 교수의 설명을 인용해 볼까요.

“대한민국의 안보와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간첩 남파가 격감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었지만, 방첩 일선의 대공수사요원들로서는 직업 안보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간첩은 반드시 필요했다. 오지 않으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했다..”

즉 갑자기 줄어든 북한 간첩은 남한의 공안당국의 일거리를 급격히 줄였고 이에 공안기관들은 뭔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고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개발했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공안 기관들에게 재일교포 유학생이란 최고, 최적의 간첩 재료였습니다. 재일교포 북송 사업에서 볼 수 있듯 북한과 조총련의 영향력이 상당한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들은 곧 공안 기관의 표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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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재일동포들, 특히 조총련이나 이북 쪽이랑, 쪼금이라도 관계가 있잖아. 그럼 보안사가 개들 간첩 만드는 것 완전히 식은 죽 먹기라니까. 북조선에서는 세금을 안내. 그것 하나 맘에 들더라고 하면, 제3조2항 북괴찬양, 그냥 인사조로 아 예 그렇겠군요. 맞장구치지, 그럼 제3조.3.4.5항 고무찬양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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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남조선 가시면 고향소식 좀 전해주십시오. 그것은 지령사항. 그래서 그 인간이 입국하면 잠입, 친구의 고향에 내려가면 탐문, 그 일본행 비행기로 타고 돌아가면 탈출, 돌아와서 전화로 당신 고향 개고기 맛은 일품이야 라고 말하면 통신연락의 보고가 되는 거고, 그래서 보안사애들이 김포공항에서 내내 매일 죽치고 있는 거야. 간첩후보들 골라내려고. 그 새끼들 그것 때문에 출세한 거야. 특진해서 장군 해 먹고..”

한국의 재일교포 정책은 기민 정책, 즉 버려두고 신경쓰지 않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재일교포들의 열렬한 투쟁의 산물이었던 조선학교 자체가 좌익에 기울었다는 이유로,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계열이라는 이유로 험악하게 바라보았고 심지어 일본 정부에 조선학교 문을 닫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재일교포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전혀 다른 예 하나를 들어 볼까요.

프로야구가 생겨나기 이전 최고의 인기 스포츠 이벤트는 고교야구였죠. 그런데 1955년 이후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으로 건너와 경기를 치렀고 전국 고교야구대회의 한 멤버로서 1997년까지 줄기차게 출전했던 팀이 있습니다. 바로 재일교포 야구단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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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명한 장훈도 재일교포 팀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은 적이 있었고 투수 김성근은 한국 방문을 계기로 아예 한국에 눌러앉았습니다. 그 이후 한일 양국에서 쟁쟁한 이름들이 된 스타들이 재일교포팀의 이름으로 한국팀을 밟았다. 매해 고국을 찾았던 그들이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죠

비용 문제 뿐 아니라 ‘총련계’ 학생은 입국 못한다는 남한 당국의 철없는 고집과 “한국에 가면 죄다 군대에 끌려가야 한다.”는 유언비어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편견 등 많은 질곡이 있었지만 재일교포들은 자신의 아들들을 설득하고 꼬드기고 부추겨서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그래도 네 아버지의 나라인데 한 번 갔다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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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력은 충분히 우승을 넘볼 수 있었지만 수십 년 사이 재일교포팀은 준우승 3회에 그 쳤을 뿐 한국 고교 야구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반쪽바리’에 대한 견제였다. 일본에서 온갖 민족차별을 경험하고 자랐고 억지로라도 자신의 출신을 잊으려 노력하면서도 그래도 조국을 찾아보겠다고 온 선수들에게 본토의 일부 못된 한국인들은 ‘반쪽바리’라는 경멸을 던졌고 “그래도 재일교포한테 져서야 되겠냐.”면서 심판에서 선수들까지 단결(?)했던 거지요. 한국 말 제대로 못한다고, 일본 이름이 있다고, 일본에서의 ‘조센징’ 들은 ‘반쪽바리’라는 모욕을 들어야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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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으나 태생지는 일본이었고 한국보다 일본에 익숙하나 한국을 알고 싶어했던 재일교포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공안당국의 먹이가 됩니다. 2010년 7월15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의 재판부(재판장 이강원 부장판사)는 재일동포 이종수(57) 간첩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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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국민을 보호하고 내국인과 차별대우를 해서는 안 될 책무를 가진 국가가 반정부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정권안보 차원에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피고인이 한국어를 잘못하여 충분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을 악용하여, 재일동포라는 특수성을 무시하고 오히려 공작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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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재일교포들이 툭하면 불거지는 재일교포 간첩단의 일원으로 도표에 오르거나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체포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간첩이 되고 삶이 바닥으로부터 와해돼 나락으로 떨어지는 악몽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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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학 88학번입니다. 대학에 들어갔던 해 상당히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렇게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된 재일교포 학생 하나가 고문에 못이겨 난로를 끌어안아 참혹한 상처를 입고도 이십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름은 한 번 듣고도 까먹지 않을 만큼 독특했습니다. 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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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 그분의 19년 감옥에서의 삶을 담은 책을 소개하는 자리에 제가 참석할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저는 이것도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특별하건 특별하지 않건 모든 일상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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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역사입니다.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읽고 있는 독자에게도.

어디선가 이 내용을 봤습니다.
다시 봐도 갑갑하네요.
저분의 한서린 반평생을 누가 위로해줄수 있을지요?

제주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4.3.과 엮어서 간첩취급했다고도 들었어요..

서승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음에도...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간첩조작사건들은 늘 새로운 공포와 참혹함으로 가슴을 후벼팝니다...

절대 잊지 않아야 할 민주주의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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