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비극 밸푸어 선언

in #kr6 years ago

1917년 11월 2일 밸푸어 선언

언젠가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몇 장의 종이가 88만 달러에 팔린 적이 있다. 대문호의 자필 서신이나 습작이나 대화가의 연필 스케치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영국 외무 장관이 끄적인 서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서한은 휘갈긴 글자 알파벳 한 장 한 장에 후대의 수십 년 동안 흘릴 피비린내와 배신의 역겨움이 서려 있는 문제적 서한이었다. 서한의 작성자는 밸푸어. 초안은 1917년 7월 17일에 작성됐으나 발표는 1917년 11월 2일이었다. 서한의 수신자는 유태계 거부 로스차일드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미군이 참전하긴 했으나 그 시점에서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독일군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동부전선의 러시아 군은 궤멸 상태에서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독일의 잠수함들은 영국의 상선들을 거침없이 격침시키고 있었다. 즉 영국으로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경일 즈음이었다.

이때 영국의 유태인 지도자들인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가 유태인의 도움을 전제로 한 영국의 조처를 끈질기게 촉구했고 결국 외상 밸푸어는 로스차일드로 대변되는 유태계 자본에게 영국의 약속을 전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독립 국가 건설 지지” 시오니스트들은 열광했다. 드디어 로마 제국의 정복 이후 전 세계로 흩어진 유태인들이 꿈의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그들의 송가 하티크바를 부를 날이 만져질 듯 다가온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에게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도 내가 살고 있는 땅을 누구에게 준다는 것인지 영문조차 몰랐지만 유태인들도 좋아라 할 일만은 아니었다. 영국은 심각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 다리였다.

영국은 1년 전에는 정반대의 약속을 철석같이 하고 있었다. 메카의 태수 후세인에게 수 차례 서한을 보내 투르크 치하의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아랍인의 해방을 약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보 장교 로렌스가 중동에 파견되어 아랍인들의 대 투르크 게릴라전을 돕도록 했고 우리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보는 바처럼 다마스커스 같은 주요한 거점을 함락하여 투르크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칠 수 있었다. 밸푸어에 열광했던 유태인들만큼이나 태수 후세인도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이 보낸 서한에 고무되어 있었다. “영국이 보장했다!” 결국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미끼로 두 마리 고기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낚시꾼은 낚시대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한 미끼를 두고 물고기들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영국은 또 한 다리를 걸쳐 두고 있었다. 맥마흔의 서한보다도 밸푸어 선언보다도 더 먼저 1915년쯤에는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 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1916년 7월에는 이미 최종 협약서에 사인을 끝냈다.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라 불리는 이 협정의 골자는 다름아닌 아랍 지역 나눠 먹기였다.

영국은 지중해와 요단강 사이의 해안지대와 요르단, 이라크 남부 그리고 하이파와 아크레 항을 확보하여 지중해 수로를 장악할 것을 보장받았고 프랑스 몫은 터키 남동부,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북부였고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등을 챙겼다. 이 협정은 그야말로 비밀 협정이었지만 밸푸어나 맥마흔이 모를 리 없었고 영국 정부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리 없었으니 그들은 곧 이중 사기를 쳤던 셈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제정 러시아 정부가 붕괴한 뒤 볼세비키 정부가 이 협정을 공개해 버렸을 때 영국의 얼굴은 흙빛이 됐다. 하지만 결국 비슷하게나마 지켜진 건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었다. 러시아는 탈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알뜰하게 자기 몫을 챙겼던 것이다. 아랍과 유태인은 동시에 분노했다. 유태인들은 연속부절로 팔레스타인에 상륙했고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충돌했다. 영국은 눈 앞의 이익을 위해 그 후로 100년 가까이 벌어지는 중동의 혈투의 씨를 꼼꼼하게 뿌려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 봤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이렇게 그 소회를 표현한다.

“나는 동방에서 손쉽고 빠르게 승리를 거두려면 아랍인의 도움이 필수적이고 전쟁에 지는 쪽보다는 이기고 나서 약속을 깨는 것이 낫다는 믿음으로 사기의 위험을 무릅썼다. 아랍인들의 각성이야말로 동방 전쟁에서 우리 승리의 중요한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영국이 문서상으로나 진정한 마음으로나 약속을 지킬 것이라 확신시켰다. 이것을 위안 삼아 그들은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당연히 나는 우리가 해 낸 일을 자랑스러워하기는 커녕 끊임없는 수치감에 시달렸다.”

맥마흔보다는 밸푸어의 끗발(?)이 높았기 때문일까. 중동의 판세는 밸푸어 선언이 제시한 대로 흘러간다. 끝내 팔레스타인에는 다비드의 별이 솟았고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을 몰아 내고 장벽 속에 가두고 학살했고 아랍 세계의 개입을 물리쳤다. 그 와중에 밸푸어 선언에서의 한 구절은 깡그리 잊혀진다.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아마 밸푸어가 오늘날의 모습을 봤더라면 로렌스만큼이나 수치감에 시달렸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여기서 영국의 표리부동과 신의 없음을 지적하며 역시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기는 쉽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 짓을 한 것은 영국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공동체가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스스로의 이득을 배제하고 이타적인 관점을 유지한 예는 장담컨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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