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하기룡 선수의 명복을 빌며

in #kr3 years ago

고 하기룡 선수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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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초창기 MBC 청룡의 에이스로 기억되는 하기룡은 본디 부산 출신이었다.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했으니 순리대로 갔으면 최동원에 앞서서 롯데의 에이스로서 구덕구장의 수호신으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기룡의 야구 초년 인생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부산고에 특기생으로 입학했으나 6개월만에 선배 선수들과의 불화로 혼자서 상경, 배재고를 찾아갔다.”(조선일보 1973년 12월 4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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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기룡은 육상 선수였다고 하니 운동 신경은 대단히 좋은 호타준족이었던데다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도 걸출했다. “선배는 부모님과 동격이며 하느님의 동기동창이다.”는 달 보고 짖는 견공 소리가 시퍼렇던 시절, 선배들과 부딪치고 혼자서 서울로 올라가 다른 학교의 문을 두드릴 정도였으니 배짱 역시 대단히 두둑한 위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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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등학교는 운동부가 많기로 유명한 학교다. 야구부도 있었다. 배재고 야구부는 무려 1920년 전조선 야구대회 우승팀이었다는데 그 이후로 시들시들하다 해체됐지만 70년대 고교야구 붐과 더불어 재창단에 이른 팀이었다. 그러니 하기룡 정도의 유망주가 나 데려가요 하니 반색을 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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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배들과 불화를 빚는 되바라진 신입생이라 해도 부산고등학교가 군계일학의 재능을 보이는 선수를 널름 서울 학교에 내 줄 리는 없었다. 부산고와 배재고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하기룡은 1,2학년을 거의 생으로 날려 버린다. 학적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으니 출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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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단 배재고는 하기룡을 야구부가 없는 경주 효성고등학교에 전학을 시킨 뒤 재차 배재고로 옮기는 학적 세탁(?)을 감행하면서 하기룡을 배재고 선수 명단에 넣는데 성공한다. 1973년. 하기룡은 고교 야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하기룡과 신언호, 그리고 이광은의 황금 트리오를 보유한 배재고는 바야흐로 재창단 후 첫 우승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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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기 대회 1차전에서 배재고등학교는 호남의 신예 광주상고를 만난다. 하기룡은 마운드에도 올라 역투하고 홈런도 날리면서 펄펄 날았고 배재고에 승리를 안겨 주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광주상고가 하기룡을 부정선수로 물고 늘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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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등학교와의 승강이와 이중 전학의 해프닝 와중에 학적 등록이 늦어진 것이 패착이었다. 하기룡이 배재고등학교 학적을 완전히 얻은지 얼마 안돼 청룡기에 출전했고 광주상고는 “전학생은 등록 후 석 달이 지나야 자격이 주어진다.”는 규정을 들이밀었다. 이런 내막이 제대로 알려질 리 없었고 배재고의 에이스이자 홈런타자 하기룡은 경기장에서 증발해 버렸다. “부정선수 낙인도 아리송한채 배재고 하기룡 홈런 친뒤 잠적”(동아일보 1973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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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기둥이 무너진 뒤 본의아니게(?) 전설로 남은 사람이 후일 MBC 청룡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리는 이광은이다. 에이스 하기룡이 빠진 뒤 그는 배재고 최후의 수호자로 나설 수 밖에 없었는데 광주상고와 첫 게임을 했던 6월 14일부터 군산상고에 패퇴한 18일까지 “5일 동안 연속등판해서 무려 59이닝을 던졌고, 223명의 타자에게 697개의 공을 던져 32안타와 7점을 내준 진저리나는 기록이 남았다. (오마이스타 2007년 10월 25일 ‘하루에 140구... 순하고 독한 '전설의 고무팔' 이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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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은 본인도 말도 안되는 혹사를 당한 셈이었지만 어디에선가 그 경기를 지켜봤을 하기룡의 속도 속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 어떻게든 야구로 승부를 봐야 했던 하기룡이었다. 얼마나 속에서 천불이 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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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기 대회가 이어졌지만 하기룡은 여전히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준결승에 이르러서야 출장 금지가 풀리지만 그래도 영화 <베테랑>의 유아인의 대사처럼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되는데 문제를 삼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기에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결승전 상대는 그 이름도 유명한 장효조가 버티고 있던 대구상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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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상대팀의 에이스를 물고 늘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상고 교장 손만호는 “져도 좋으니까 선수 하나 살리는 셈 치자.”고 하기룡의 출전을 양해했고 하기룡은 마침내 봉황기 결승전 마운드에 오르게 된다. 비록 우승기는 대구상고가 가져갔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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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를 치르며 하기룡을 데려오고 초고교급 포수인 신언호와 무쇠팔 고무팔 이광은까지 거느리고 우승을 노리던 배재고등학교는 결국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20여 년 뒤에야 꿈을 이루지만) 야구를 마음 놓고 하고 싶어 서울의 학교 문을 홀로 두드렸던 하기룡도 제대로 된 성적을 보여 주지 못했다. 그 한이 풀린 것은 뜻밖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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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한일 고교야구 선발팀간의 교류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1973년 일본의 고교아구 선발팀에는 특별한 이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에가와 쓰구루 (江川卓) ‘괴물투수 에가와’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초고교급 투수였다. 퍼펙트 경기와 노히트 노런을 거짓말 좀 보태 밥먹듯 했던 당시로서는 진짜 ‘괴물’이었다. 그 해 시즌 내내 홈런은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에가와가 하기룡에게 ‘발려’ 버린다. 하기룡은 17이닝을 던지면서 자책점 1점, 방어율 0.06을 기록 (경향신문 1973년 12월 11일)하며 에가와를 비롯해 한국 고교 야구를 우습게 보던 일본팀의 콧대를 여러 조각으로 분질러 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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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역 고등학교 야구 선수 중 최고의 노른자위로 꼽혀 스카웃 열전의 대상이 됐던 그의 선택은 “직장을 구해 부모님을 돕기 위한” 실업팀 상업은행이었다. 당시 서울 지역 고교 야구 선수들은 요즘 말로 하면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는 스타들이 많았다. 별로 얼굴을 디밀지 못했던 하기룡도 수십 통의 펜레터를 받았지만 답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무심하게 인터뷰하고 있다. (위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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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야구로만 일로매진했던 프로야구 초창기 MBC 청룡의 에이스로 내 기억에 선명히 남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기량에 비해서는 불운했던 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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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해태 타이거즈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다. 1983년 코리안 시리즈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해태보다 후기리그 우승팀 MBC가 유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던 이유다. 그런데 MBC 김동엽 감독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에이스 하기룡을 내세우지 않았다. 1차전 2차전 다 다른 투수가 나와 패전을 했고 3차전에서도 선발은 이광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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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무사 2,3루의 위기를 맞았고 그제야 하기룡이 등장했다. 상대 타자는 왕년의 군산상고의 영웅 김봉연. 하기룡이 던진 건 빠르고 낮은 직구였는데 김봉연은 마치 골프를 치듯 공을 ‘퍼올리면서’ 쓰리런 홈런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뇌리에 선명한 장면..... 김봉연 본인도 그 야구 인생에서 제일로 치는 홈런이었거니와 하기룡은 ‘구원투수의 초구를 노려라’는 야구계 격언의 본보기로 한국 프로야구역사에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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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카메라에 잡혔던 하기룡의 표정은 서늘할만큼 어두웠다. 그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그 후 은퇴한 뒤에도 지도자로서는 그리 빛을 보지 못했고 모교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는 시끄러운 구설수에 휘말려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늘 문득 그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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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쯤 저승에서 그가 처음으로 마운드에서 맞은 결승전에서 사투를 벌였던 대구상고 출신의 장효조 선수와 악수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서늘을 넘어 싸늘했던 홈런 직후의 그 표정 말고, 대구상고 교장의 양해로 결승전에 개운하게 출장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홀가분한 얼굴로 인사하고 있으리라.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역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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