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여우 롬멜의 최후

in #kr4 years ago

1944년 10월 15일 사막의 여우의 죽음

언젠가 개봉됐던 영화 <발퀴레>는 히틀러의 광기로부터 독일을 구하기 위해 히틀러 암살 및 나찌 정권 전복 쿠데타를 시도했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였다. 이 영화 말미에 슈타우펜베르크 등은 총살당하는데 다른 주동자들은 정육점 갈고리에 건 피아노줄로 목을 졸랐고 히틀러는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두고두고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돼지 새끼처럼 매달고 싶었지만 히틀러로서도 그럴 수 없었던 인물이 있었다. 에르빈 롬멜 독일 육군 원수가 그였다. 그가 음모에 가담했다는 확증은 없었지만 암살 계획자들의 문서에 사후 지도자의 하나로 에르빈 롬멜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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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프랑스 전선에서는 압도적일만큼 신속한 기동 전술로 독일군 수뇌부까지 당황시킨 전격전을 펴 영국 원정군을 독안의 쥐로 만들었으며 멋모르고 북아프리카에 뛰어든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일종의 구원투수로 독일군 북아프리카 군단의 지휘관으로 투입돼 한때 영국군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던 ‘사막의 여우’ 롬멜이었다. 물론 그의 실제 성과는 그의 명망에는 많이 못 미치며, 그의 전설은 상당 부분 나찌의 선전술, 또는 적을 높여 스스로의 성가를 높이려는 연합군측의 과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를 감안하더라도 그를 명장 반열에서 끌어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천하악질 히틀러였지만 그 롬멜을 마구잡이로 잡아죽일 수는 없었다.

1944년 10월 15일 두 명의 장군이 롬멜의 집을 방문한다. 그들은 히틀러의 명령을 가지고 왔다. 반역죄로 처형당할 것인가 음독 자살하여 최후의 명예는 지킬 것인가의 양자택일령이었다. 롬멜은 아내와 아들에게 이별을 고한 후 음독자살한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운전병의 증언은 이렇다. “저는 차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고, 마이셀 장군이 저를 데리고 차를 떠났습니다. 한 5분이나 10분쯤 뒤 베르크돌프 장군이 마이셀 장군과 저를 다시 차로 불렸죠. 그 때 롬멜 원수가 뒷좌석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혼수상태였고, 앞으로 쓰러져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신음하는 것도, 숨이 넘어가는 소리도 아닌 흐느낌이었습니다. 그의 군모와 지휘봉은 좌석 밑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바로 앉히고 그의 군모를 다시 씌워 주었습니다.”
(곰PD의 전쟁 이야기 - http://blog.ohmynews.com/gompd/154824중)

그렇게 롬멜은 죽었다. 롬멜의 신화가 일부 과장됐을지언정 그가 진정한 군인이었고 인격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오른 이였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프러시아 제국 이래 독일 육군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귀족 분위기에서 동떨어진 평민 교사의 아들이었고 그로 인해 여러 번 그 공훈에 비해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인물이었다. 열렬히 사랑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못한 사랑도 상대가 귀족 가문이었던 탓이 컸다고 한다. 얼마 전 공개된 롬멜의 연애 편지는 사막의 여우 역시 사랑 앞에서는 정신을 잃는 보통 남자였음을 느끼게 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기 때문에 내 삶은 행복해. 7월 초가 되면 시간을 내 바인가르텐에 갈 수 있을 거야. 부드러운 키스와 인사를 담아. 당신의 영원한 사랑 에르빈이....”

집안의 반대 끝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졌지만 그 사이의 사생아를 끝까지 돌볼만큼 책임감도 있었던 롬멜. 그는 전쟁터에서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영국군 야전병원에 물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물을 가득 실은 차량에 백기를 꽂아 영국군에게 보냈고 영국군은 이에 감격하여 위스키와 콘비프로 화답한 일은 유명하다. 또 격전의 와중에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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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계속해서 격렬해지고 있소. 나는 그것이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소...... 그래서 내가 저축해 둔 2만 5천 리라를 그 편에 동봉하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신의 손에 달려 있소. 아들과 함께 잘 살기를 바라오. 당신과 아이에게 키스를 보내오.” 여기까지는 그저 용감하고 결기 있는 무인의 편지 정도이지만 그 다음 추신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고위층 군인들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면모를 발견한다. “추신 : 리라는 외환 관리 규정에 따라서 환전하기 바라오.”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저축했던 돈을 아내에게 보내면서, 국민적 영웅이며 독일 육군의 원수였던 롬멜은 아내에게 “외환 관리 규정”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출세 가도로 이끈 히틀러에게 충성했지만 나찌당에는 가입하지 않았고 유태인 학살에 대해 “러시아에서의 학살, 유태인 학살을 주도하는 친위대들은 독일 군인 본연의 모습이 아니며 비겁자들의 집단일 뿐”이라고 혀를 찼으며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휘하 부대를 철수시켰던 롬멜. 그는 천상 군인이었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고 한 인간으로서도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역사의 소모품이 된다. 어떠한 의미로든 ‘반역’이란 그의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던 군인 롬멜. 그는 히틀러 암살 사건 이후 자신이 총애하던 장군이 숙청의 회오리에 휘말렸을 때 그의 구명을 탄원하면서 이렇게 호소했다.

“존경하는 총통 각하. 1940년의 서부전선 전격전, 1941년과 1943년 사이의 아프리카 전투에서, 1943년의 이탈리아에서, 1944년의 서부 전선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에서 제가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했던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 머리 속에는 새로운 독일을 위한 최후의 승리 외에는 없습니다.” 자신의 이력을 줄줄이 읊는 데에서 히틀러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이 배어나지만 그는 히틀러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을 위해 싸워야 하는 군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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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인격과 무서운 책임감에다가 그에 못지않은 출중한 재능을 가졌지만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을 잘못 선택한 탓에, 또는 그렇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끝내 벗어던지지 못하고, 장렬하지만 허무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사람들은 예상 외로 많다. 에르빈 롬멜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처칠의 말대로 상대편에게는 “전쟁의 재앙이지만, 장군으로서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했던” 롬멜은 1944년 10월 15일 자신의 운전병 앞에서 흐느끼다가 세상을 등졌다. 마지막 순간 그가 안타까와했던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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