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슨탕의 존슨

in #kr4 years ago

1966년 10월 31일 존슨의 방문

미국에 간 한국 대통령 중에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박정희다. 1965년 ‘5.16 4주년을 기념’ (핑계 한 번 어색하다)하여 미국행에 오르는 박정희를 위해 미국은 국무부 의전국장과 대통령 특별 전용기를 서울에 보낸다. 가히 ‘모셔 오는’ 모양새였다. 미국에 도착한 뒤에도 박정희는 눈이 접시만큼 커지는 환대를 받는다.
.
거리에는 수만 인파가 몰려나와 박정희를 환영했으며 뉴욕에서는 카 퍼레이드까지 열어 주었다. 한국인들이 영화에서나 보던 맨하탄의 고층 건물로부터는 오색 색종이가 하늘을 뒤덮으며 떨어져 내렸다. 워싱턴 DC는 ‘박정희 대통령의 날’을 선포하고 국빈 예우를 깍듯이 갖췄다. 박정희 일행은 “한미 관계의 신기원”이라며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오뉴월의 서리만큼도 없는 법, 그건 월남 파병을 어서 해 달라는 미국의 외교 공세였다.
.
몇 달 후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던”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베트남 땅을 밟았고, 9사단 백마 부대까지 증파된다. 미국은 어떻게든 보다 많은 한국군 증파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966년 10월 31일 그 동안 특사를 통해 파병을 종용하던 미국 대통령 존슨이 직접 한국 땅을 밟은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

image.png

당시 한국은 아시아 7개국 순방 중 마지막 방문지였다. 인기 없는 전쟁을 밀어붙이던 존슨은 가는 곳마다 그렇게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 심하면 “존슨 고 홈!”을 외치는 시위대와 마주해야 했기에 의기소침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 발을 디딘 순간 존슨의 입은 열렬히 벌어진다. 일단 김포공항에 박정희 대통령 이하 1만 명의 시민들이 도열해서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것부터 시작하여 180만이 넘는다고 보도된 인파가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존슨을 맞았다.

“많은 나라를 가 봤지만 이런 환영은 처음이다!” 천하의 미 합중국 대통령 흥분하셨다. 급기야 너무도 뜨겁게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향한 벅찬 감동을 억누르지 못했던지 돌발적으로 차에서 내려 시민들에게 다가가려다가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아직도 상당 부분 미국의 원조에 지탱하고 살아가던 나라의 국민들에게 미국 대통령은 하늘의 사자급으로 환영해 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미국 기자들도 어리둥절했다. “한국에 오니 반미 구호도 없고 존슨 고 홈 구호도 들리지 않아요.” 전통 우방국이라는 곳에 가도 “존슨 오늘은 몇 명의 어린애를 죽였냐?” 피켓이 난무하는 분위기에서 3개 사단씩이나 되는 전투 부대를 파병해서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라고 쓰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라고 읽는다) 생피를 흘리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 이런 환영을 베풀어 주다니. 이때 한국 관리는 자신만만하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반미주의자같은 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
존슨도 기분이 최고조였다. 농촌 출신이었던 그는 한국의 농촌 구경을 하고 싶다고 했고 정부는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던 수원으로 안내했다. 중학교 운동장에 헬기가 내렸는데 3만 명의 수원과 화성 시민들이 구름같이 몰려와서 존슨 만세를 외치며 그를 맞았다. 존슨은 마을 주민들이 선물한 사모 관대를 입어 보기도 하고, 즉석에서 한 노인을 헬기에 태워 한 바퀴를 도는 등 가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그리고 존슨이 다녀간 중학교 뒷산은 ‘존슨 동산’으로 명명되어 존슨이 그 제막식 테이프를 끊고 돌아간다. 지금도 그 비석은 남아 있다. (이건 웬 김일성 필이란 말이냐) 이태원의 명물 '존슨탕'도 그즈음 명명됐다는 전설이 유력하다.
.
아무리 봐도 까마득한 얘기다. 월남 파병으로 인해 미제국주의의 용병 소리를 장히 얻어먹고 외교적으로 고립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은 그 핏값마저도 요긴한 나라였고, 미국 대통령이라면 만사 때려치우고 달려나가서 팔이 부러져라 성조기를 흔들어대야 하는 시절이었다. 어떤 이는 그 시절의 뜨거운 한미우의(?)가 그립기도 하겠지만 지금 얘기하자면 혀를 차면서 허허 참 그때는 그랬지 하면서 머리를 긁는 사람이 주종일 것이다. 하지만 안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신기해지기도 한다.
.
세상은 변했고 왕년의 한국이 오늘의 한국이 아니며 미국 형편 보면 천조국도 별 수 없다지만 암튼 좀 별스런 과거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Coin Marketplace

STEEM 0.16
TRX 0.15
JST 0.029
BTC 57659.68
ETH 2443.81
USDT 1.00
SBD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