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는 부산으로 오지 못했다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 호의 최후
죽음이란 본질적으로 슬프다. 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 백 살을 넘긴 호상이라 해도 남은 사람들은 이별을 슬퍼하고 더 이상 같이 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그 슬픔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슬픔이라면 그 죽음조차도 알릴 수 없이 죽어가는 일일 것이다. 세월과 역사의 검은 장막 안에서 백골이 진토돼 가도 그 죽음의 내막을 알 수 없는 죽음일 것이다. 1945년 8월 24일 일본 오미나토 항구에서 부산으로 가던 수송선 우키시마 호는 그런 슬픈 죽음들을 떼로 끌어안고서 바다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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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의 음울한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이 공표되고 전쟁은 끝났다. 이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대기 위해 일본 각지에 끌려와 있던 조선인들의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무더기로 끌고 오긴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보니 일본 각지의 조선인 집단은 일본 정부에게 처치 곤란의 골칫덩이로 부상했다. 과거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고 수천 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솜씨는 아직까지 녹슬지 않아서 홋카이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선인 노동자 숙소에 불을 질러 떼죽음을 시키는 일도 벌어지긴 했지만 그렇게 처리할 수도 없었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도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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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공항, 가바야마 공항, 해군 23부대 등 군사 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일본 시모키타 반도. 당연히 거기에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수도 없이 끌려와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당연히 조선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일본인들도 수천톤급 수송선 우키시마에 그들을 태워 돌려 보내겠노라고 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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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이상한 일은 “이 배가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다.”는 식의 절박한(?) 홍보가 잇따랐다는 점이었다. 이 말을 듣고 조선인들은 필사적으로 그 배에 타려고 했다. 자연히 우키시마에는 그 정원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올라탔다. “행보가 부자유스러울만큼 배 안이 비좁았다.”는 생존자의 증언이니 가히 아프리카 흑인 노예선 아니면 몇 년 뒤의 흥남부두 탈출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찼을 것이다. 몇 명이 탔는지는 알 수도 없었다. 5천명이라는 사람도 있고 1만 명이 넘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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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이틀 째, 우키시마는 부산으로 가던 중 마이즈루 시모사바 앞바다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침몰하고 만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깔아놓은 기뢰 폭발로 3750명의 승선자 중 52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하지만 3750명이라는 승선자 자체가 ‘공식적’인 집계일 뿐, '비공식적‘으로 그 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탑승했으며 수중고혼이 되었는지는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게 된다. 기뢰 폭발이라는 발표에도 의문은 가지를 치고 줄기를 올렸다. 우선 기뢰폭발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물기둥을 목격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수천 톤급의 수송선이 거의 단번에 두 조각이 날 기뢰 폭발이라면 갑판까지 들어찬 사람들을 집어삼킬듯한 물기둥이 치솟아야 당연한 것인데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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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존자들은 일본인 승무원들이 배를 탈출하는 것을 목격했고 그 뒤에 대폭발이 있었다는 증언을 했고 승선했던 일본군 생존자로부터 “폭탄을 장치했다”는 고백을 들었다거나 “폭탄을 발견했으나 제거하지 못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히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일본군들은 “배의 연료가 부산까지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증언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갈 연료는 주지만 올 연료는 주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 “갈 데까지 갈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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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키시마는 부산까지 갈 예정이되 부산까지 갈 상황은 못되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함장 이하 일본군 승무원들도 출항을 거부하다가 일본도까지 뽑아드는 상관의 협박으로 강제 출항을 했다는 전언도 있고 배 안에는 “우키시마는 부산까지 못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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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황들은 일본군과 정부의 계획적인 폭침이라는 심증을 강하게 주지만 그를 명백하게 입증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그득 채운 위에 수백 톤의 돌까지 싣고 있어 인양이 어려웠다는 점은 더욱 황망하지만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 인양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후 신생 한국 정부와 조선 정부는 그 진상을 밝히기에는 제 코가 석 자였다. 결국 우시키마 호는 지금도 바다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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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우키시마를 인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건 진상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배를 고철로 사용하려는 용도 때문이었다. 거기서 나온 유골들은 화장 후 공식 발표됐던 사망자 524명에 맞추어 분골했다고 한다. 즉 사람 수를 헤아린 것이 아니라 숫자에 사람을 끼워맞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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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마이즈루에는 이 비극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다. 치마 저고리 차림의 여성이 아이들을 부여잡고 부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이 상을 만든 것조차 한국이나 조선 정부가 아니라 마이즈루의 와다 중학교 미술 교사 가에 요츠히코였다. 그에 따르면 이상하게도 동상의 눈가 아래쪽은 항상 이슬로 젖어 있다고 한다. ( http://blog.daum.net/gimbak/5927219에서 인용)
희생자는 대부분 부산 경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돌아보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를 곱씹어 보면 여간 슬픈 것이 아니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지금도 우키시마의 잔해에는 수천인지 수백인지 알 수 없는 유골들이 구멍난 눈을 감지 못하고 있고 일본 최고 재판소는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이 없다는 최종 판결을 냈다. 우키시마는 부산으로 가지 못했다.
저도 이 내용을 재일교포들의 다큐멘터리로 보고 들은적이 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잔인할수 있을까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 가능한 잔인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물들이었어도 그렇게까지 못 할것 같은데... 행한대로 받을겁니다. 누구의 저주가 아니어도...내가 한대로...
내용 중에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정황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이지만.... 가슴 아픈 일이죠.
슬픈 과거네요.
아직도 일본놈들은 과거 식민지를 꿈꾸고있고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있으니 정신똑바로 차려야겠어요.~^^
식민지 꿈꾸는 일본인들에 앞서서 우리 스스로 바람직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네.
맞습니다.
이런 과거도 있지만 뉘우치지않는 일본사람들땜에...
내가 일본을 안갑니다..
가서 돈쓰는것 자체도 아깝다는 생각이....
다른나라로 가고말지....
이런거보면 속이 뒤집어져요...
독도도 뻔히 우리나라 땅인걸 알면서도
자기네땅이라고 우기는 놈들....
저는 일본 자주 가고 싶습니다... 배울 게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거든요 식민지 시대의 악몽과는 별도로
하긴 사람마다 다르니까... 혼자만 열내서 죄송 ^^
일본은 저 많은 행동의 책임을 어찌 하려고..... 신과함께 처럼 있다면.. 모두 영화속 지옥에 들어가 있을듯 하네요 ...
제국주의 시대 많은 나라 백성들이 그럴 겁니다. 미 영 프 벨기에 독일 할 것 없이..... 비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