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친 통치자들 5 신나라의 왕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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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친 통치자들 5 신나라의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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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기준으로 세운 사회적 합의를 ‘상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하지만 역사 속에는 상식에 한참 어긋나는 사건과 사람들이 그야말로 은하수의 별들처럼 많다. 오늘은 참으로 기묘한 방식으로 한 거대한 나라를 틀어쥐고 자신의 왕조를 개창했다가 순식간에 허물어뜨리고 말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주인공은 왕망(기원전 45년~기원후 23년)이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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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의 집안은 한나라 건국 이래 큰 힘을 쓰지 못했는데 왕금이라는 이의 딸 왕정군이 운 좋게 원제의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이 성제로 즉위하면서 날개를 달게 됐어. 왕정군의 형제들은 물론 일가붙이 전부가 승승장구했다. 왕망은 왕정군의 조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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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은 그가 차지한 벼슬이나 능력보다 자로 대고 그린 것처럼 반듯한 도덕군자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건 계산된 행동의 결과였어. “당시에는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서 관리를 뽑을 때에도 도덕성을 우선적인 기준으로 삼았다. 이에 왕망은 스승 진참의 교육을 통해 적어도 겸손, 예절, 효성, 청렴을 근간으로 하는 유가적인 도덕성에서만은 확실히 앞서겠노라고 다짐한다(김원동 외, 〈제국의 탄생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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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였던 큰아버지 왕봉이 중병에 걸리자 왕망은 몇 달 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으며(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얘기겠지) 큰아버지를 간호한다. 이런 기특한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왕망을 뇌리에 새기게 돼. 황실은 물론 외척 왕씨들의 사치가 극에 달하던 즈음 왕망은 검소함의 끝을 달렸어.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허름한 옷을 입은 왕망의 부인을 보고 노비로 오해할 정도였다면 굳이 더 보탤 말이 없겠지. “왕씨 집안에 인물 나왔네. 인간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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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도 교만하지 않았고, 자신의 토지에서 나온 수입을 선비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나면 채식만 하며 근신했다. 이제 사람들은 성인(聖人)이 나왔다고 해도 곧이들을 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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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왕망의 둘째 아들 왕획이 자신이 부리던 노비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어. 당연히 노비도 하늘이 낸 귀한 목숨이지만 당시 신분제도 아래서 노비 하나 죽이는 것은 큰 허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망은 아들을 불러 칼을 내민다. “어서 목숨을 끊어 네 죄를 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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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권력자들은 종종 이런 유의 ‘쇼’를 벌인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는 ‘보리밭을 밟는 이는 죽이겠다’는 군령을 내린 뒤 자신의 말이 뭔가에 놀라 날뛰다가 보리밭을 짓이기자 짐짓 칼을 빼서 죽겠다고 우긴 일화가 있지. 당 태종은 메뚜기 피해가 극심하자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나 한 사람에게 있다. 너희가 신령스럽다면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으라” 하고 외치면서 메뚜기 두 마리를 삼켜버리는 ‘쇼맨십’을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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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왕망의 쇼맨십은 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역대급이었어. 그의 말은 허풍에 그치지 않고 실행되었다. 그러니 이런 명성을 얻지 않았겠니. “아들의 죄도 용서 않으시는 왕망은, 성인군자 여럿 찜쪄먹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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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자 왕망이 황하강은 서쪽으로 흐른다고 해도 믿을 사람들이 생겨났어. 왕망은 이 열렬한 추종자들을 움직여 남을 때려잡는 것에 능수능란한 실력을 보인다. 손자병법 36계 중 제3계 차도살인(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임)을 기가 막히게 써먹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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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로 나서지 않고 넌지시 주변에 흘린다. 그러면 왕망의 추종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 대상을 탄핵하며 처벌을 받게 만든다. 이후 왕망의 액션 큐. “아아 이 일을 어찌하리. 이런 일로 그를 내쳐야 하다니.” 그리고 뜨거운 눈물 몇 방울. “가슴이 아파 차마 볼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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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년,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 한나라 수도 장안에는 48만7572개의 죽간(竹簡:대나무에 글씨를 쓴 것) 이 전국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많은 사람이 썼지만 내용은 같은 상소문이었어. “왕망의 공덕이 하해와 같으니 그에게 더 큰 상을 내리소서.” 추종자들의 열기는 그깟 죽간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왕족 관리들로부터 평범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수도 장안에 몰려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황궁 앞 광장을 지키며 왕망에게 상을 내리라고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제국의 탄생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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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은 이런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허수아비 황제로부터 선양(임금의 자리를 물려줌)을 받아 새 왕조를 연다. 이게 신(新)나라야. 그러나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어. 왕망은 여러 개혁을 실시했지만 그가 제시한 개혁의 모델은 800년쯤 전의 주나라 시대였어. 개혁과 현실이 맞물려 돌아갈 리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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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이 도덕군자일 때는 참 존경할 만한 분이라 칭송해 마지않던 관료들, ‘왕망의 공덕이 바다와 같습니다’라는 죽간을 써서 올리던 토호들이 돌아앉기 시작했어. 왕망은 그들을 어르고 달랠 정치력을 갖추지 못했지. “왕망은 군주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 왕망은 속유(식견이 변변치 못한 선비)였을 뿐이다. 멸사봉공하는 모습을 연출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공익 개념은 없었다(이윤섭,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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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서 그는 “관료와 지식인의 사익을 보장해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제위에 올랐으므로 이들의 이익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즉 왕망을 지지한 이들조차도 개혁에 동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득권층의 일원으로서 그의 구상에 딴지를 걸고 있었다는 뜻이야. 이런 불협화음 속에 백성들의 삶이 편안할 리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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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왕망은 자꾸 적을 만들었어. 내치에 실패한 자가 바깥으로 적을 만드는 것은 동서고금에 흔한 일이지만 왕망은 한나라 왕조가 흉노나 고구려를 비롯한 이웃 나라들을 대하던 예의를 버렸어. 통치자를 왕(王)으로 칭하던 것을 후(候)로 격하시키며 고압적인 자세를 보인 거야. 여기에 반발하면 전쟁을 선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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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를 정벌할 때는 자신이 ‘고구려 후’로 격하시킨 유리왕에게 군대를 보내라고 강요한다. 이에 고구려가 시원찮은 태도를 보이자 왕망이 한 행동은 그가 얼마나 유치한 인간인가를 입증하는 것이었지. “이제부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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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하고자 했으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누구의 개혁인지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 채 사방에 적만 만들었던 기묘한 도덕군자 왕망. 그가 세운 신나라는 10여 년 만에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왕년의 성인(聖人) 왕망은 천하의 표적이 됐다. 황궁으로 반란군과 백성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황궁의 점대(경복궁 경회루처럼 물로 둘러싸인 높은 누대)로 도망갔어. 그래도 왕망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중과부적, 왕망은 곧 살해됐고 그의 시신은 글자 그대로 천참만륙, 갈갈이 찢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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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군주는 백성이라는 물 위에 뜬 배이며 백성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라고 했지. 왕망은 물 들어올 때를 알고 그에 맞춰 노를 저을 줄 알았던, 그래서 물 위에 배를 띄워 만세를 불렀던 ‘꼼수’의 창업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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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배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는’ 멍텅구리 배일 뿐이었고, 그 배는 삽시간에 가라앉고 말았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위선적인 도덕군자 행세가 꽤 유효하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문제는 지지를 딛고 권력을 얻은 다음이야. 사람들의 욕망을 다스리고 조율하기 위해서는 도덕이 아니라 정치(政治)가 필요한 법이고, 이에 무능한 권력은 말로가 좋지 않다는 걸 왕망은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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