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동대문운동장

in #kr3 years ago

나, 동대문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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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고대 안암병원에 상가가 있어 들렀다. 함께 간 친구와 병원에서 저녁 먹고 맥주 한 잔 가볍게 하고 헤어지는데 문득 소슬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오면서 밤길을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에 집에 가는 버스가 있으니 목적지는 쉽게 정해졌는데 코스를 어떻게 잡을지 잠깐 망설였다. 신설동 거쳐 동대문으로 가느냐 6호선 라인을 타고 보문과 창신역을 지나 동묘에서 종로로 가느냐. 아니면 혜화동쪽으로 가느냐 가늠을 해 보다가 6호선 라인을 걸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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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보문동 언덕빼기 동네는 기억과는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길의 경사는 급하고 가팔랐지만 올망졸망 내 키와 비슷했던 집의 지붕들은 까마득한 아파트들의 병풍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대학교 1학년 때였나 한 선배가 보문동 하숙집에 데리고 가면서 단종비 정순왕후가 올라 단종이 귀양가 있던 영월쪽을 바라보던 곳이 바로 이 보문동 동망봉이라며 설명했던 기억이 가물거리며 떠올랐다. 정순왕후가 머무른 정업원이 ‘청룡사’로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절의 간판은 번다하게 바뀐 보문동 길 한 자락에 남아 있었다. 동망봉 밑으로는 터널이 뚫렸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보문동은 창신동, 동묘,나아가 종로와 쉽사리 연결되는 동네가 됐다. 고개 하나 넘으니 창신역이고 이어 동묘역이고 1호선 라인과 연결돼 동대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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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서 종로통 길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대형 약국들이 여전했고 의료기 골목 간판들도 다르지 않았다. 건물들도 후줄근하고 골목길도 여전히 정겹게 누추했다. 하지만 동대문에서 종로통길의 좌우,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시장쪽, 이화여대 병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낙산 공원쪽은 가히 상전벽해로 변햤다.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길을 잡고 보니 그 느낌은 더욱 진했다. 평화시장을 지나면 원래 저만치서 보여야 할 우람한 잿빛 건물은 온데간데 없고 은색 비행접시가 내려앉았고 ‘동대문운동장역’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이름을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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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시위가 곧잘 동대문 운동장에서 600이나 630에 벌어졌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지나가셔요) 학교 앞에서 28번 버스를 타고 내리면 쭈뼛거리며 긴장한 학생들이 운동장 앞을 오갔다. 어 형 안녕하세요 하다가는 나중에 혼쭐이 났다. 참 내.... 그런다고 경찰들이 모를까. 내가 봐도 데모하러 나온 줄 알겠는데. 한 번은 데모하는데 무슨 고교야구 결승전인가가 끝나고 사람들이 뒤엉켜서 진압도 데모도 얼렁뚱땅 끝났던 기억도 있었다. 우리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그때 술취한 ‘개저씨’들이 무슨 학교 교가를 우렁차게 불러대는데 이거 뭐 분위기가 살아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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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스타디움은 많이 가 봤지만 동대문운동장을 들어가 본 건 손으로 꼽는다. 오히려 내게는 아나운서 멘트 속 “서울운동장”이 더 귀에 익다. 한번도 ‘서울운동장’은 가 본 적 없지만 더 살갑고 익숙하다. 어렸을 때 봤던 그 모든 스포츠 중계의 태반을 소화했던 곳이 아닌가. 지금은 사라진 곳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라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로 남아 역사가 된다.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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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이 1인칭으로 풀어보는 그의 긴 역사를 짧은 사연으로 엮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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