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 할아버지의 귀환

in #kr6 years ago

'돈가스 할아버지' 강예수씨와 그 가게를 물려받은 돈가스 가게 주인장의 이야기가 방송된 후 사무실에는 수많은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새벽부터 끓여낸 소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무조건 수챗구멍에 버렸다는 깐깐한 스승(?), 그와 헤어진 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호통을 새기며 살아가는 제자(?) 의 사연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나 봅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저기요. 어제 방송 나간 돈가스 할아버지 말인데요."
"아, 그 분은 저희도 연락처를 모르거든요."
"제가 그 연락처 아는데요? 아니 방송을 제대로 알고 해야지. 멀쩡히 우리 동네에서 장사하고 계시는데 사라졌느니 뭐니 방송하면 어떡해요?"

그 할아버지 강예수씨가 서울 지하철 8호선 수진역 지하상가에서 지금도 돈가스를 만들어 장사하고 있는데 행방이 묘연한 것처럼 묘사를 할 수 있느냐는 항의였습니다. 잔뜩 볼멘 소리에 귀에 따가운 지청구였지만 그것은 실로 고마운 전화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돈가스 할아버지를 실제로 만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여의도에서 성남 수진역까지는 참으로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몇 번을 갈아탄 뒤에야 수진역 지하의 먹자 골목에 당도했지요. 하지만 거기서 할아버지네 가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돈가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상인들과 행인들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으니까요.

떨리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지난 번 잠실의 할아버지 돈가스 집 벽에 걸려 있던 바로 그 사람, 하얀 옷과 하얀 모자, 그리고 하얀 머리의 노 주방장 강예수씨가 내 앞에 거짓말처럼 서 있더군요. 당연히 초면이었음에도, 몇십년 알았던 동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이 저를 칭칭 휘감았습니다.

돈가스할아버지.jpg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할아버지는 20년 넘게 장사하던 잠실의 가게를 왜 친척도 아닌 남에게 가게를 넘기고 종적을 감추었을까, 그리고는 또 장사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같이 한 마누라가 갑자기 죽어 버렸어. 모든 게 귀찮더라고. 그래서 가게도 넘기고 훌훌 털고 고향 가서 살라 캤지요."

그렇게 신변을 정리하고 귀거래사를 부른지 몇 년이 되지 않아 할아버지는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돈가스에 모락모락 김이 솟는 소스를 그득히 내리부을 때의 손맛과, 탐스럽게들 먹어 대던 단골들의 영상, 그리고 음식에 관한한 전혀 늙지 않은 뜨거운 열정이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그의 음식은 미국과 일본의 합작품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는 일본인들이 음식을 다룰 때 발휘하는 그 근성을 배웠고, 마침내는 소스의 비밀을 알기 위해 수 개월 동안 농성(?)을 벌여 일본의 돈가스집 주인의 항복을 받아내는 청출어람을 이룩했으며, 미8군의 요리사로 일하면서는 유통 기한이 단 한 시간이라도 지난 음식을 서슴없이 폐기해 버리는 그 철저함을 배웠습니다. 견습쿡(cook)으로 지내던 어느날, 그는 미국인 취사반장에게 이렇게 항의했다지요.

"아직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름 모를 미군 취사병은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강, 너는 저거 먹고 싶니? 난 먹고 싶지 않아. 그걸 왜 우리 병사들을 먹이니?"

그것은 할아버지에게 평생의 교훈이 되었고, 흐트러짐없이 나이 여든에 가깝도록 주방에서 기름과 씨름하고 고기를 다지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그리고 그 교훈의 힘은 그리도 그를 꼭 닮고 싶어하는 제자에게 이어졌던 겁니다.

할아버지돈가스3.jpg
jtbc 방송분

다시 일을 시작하고자 했을 때에도, 그는 손쉽게 옛 단골들을 만날 수 있고 예전의 영화를 구가할 수도 있는 옛 터전 근처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나이 일흔을 훌쩍 넘겨서 생소한 곳,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새출발을 한 것입니다. "둥지를 떠난 새가 옛 둥지를 찾을 일이 없지예"가 그 이유였지요.

"내가 잘하면 사람들은 온다'는 신념으로, 그는 오로지 스스로 해 왔던 대로 돈가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이미 명품을 만들어내는 늙은 장인의 긍지로 격상되어 있었습니다. 1926년생 국내 최고령 주방장.

돈가스 할아버지는 옛 제자의 눈에 비쳤던 그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일절 술을 팔지 않는 방침도, 먹성 좋은 청소년들한테 유달리 후한 인심(학생용 돈가스는 500원이 쌌지요. 양도 많고)도 그대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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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찾아갔을 때가 이 정도 가격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좀 올랐겠죠
.

"와 학생들을 좋아하냐고예? 내가 애써 만든 음식 남기는 일이 없거덩. 참 잘 묵어예."

음식에는 깐깐했지만 사람에게는 절대로 깐깐하지 않은 할아버지의 가게엔 다양한 교복의 학생들이 언제나 진을 쳤고, 그들은 마치 친할아버지 가게에 온 양, 허물없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할아버지 나 기말고사 망쳤거든."
"얘 미팅에서 딱지 맞았대요."
"미팅이나 시험이나 다음에 잘하면 되지. 아나 더 묵어라."

보기 드물게 흐뭇했던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할아버지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내가 이 일을 와 한다고 생각하능교?"
"뭐 긍지 아니십니까? 대한민국에 나보다 나이 많은 주방장 있나 하는."
"그것도 맞지만, 요즘은 좀 미안한 맘이 더 커요. 지난 번 IMF 때도 그렇고, 요즘 일하고 싶어도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데. 나는 우쨌든 이 나이 되도록 하고 싶은 일 하니 행복하지만 또 미안한 거라. 미안하니까 음식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혹 그런 사람이 우리 집에 오면 나를 보고 힘을 냈으면 싶은 마음인기라."

갑자기 꺾어진 칠십에 몸이 전같지 않다느니, 세월 정말 빠르다느니 애늙은이 행세를 간혹 했던 조각조각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여직 저 또래의 누구보다 더 젊은 할아버지의 백발을 제대로 쳐다보기조차 어려워지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젊은 할아버지 강예수씨는 부끄러이 인사하며 나가는 제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PD양반, 내가 새 메뉴를 개발하고 있거덩. 한 한 달 뒤에 와 보소. 맛있을 끼라."

성남 수진역의 할아버지 돈가스 집에서 마주친, 한 노인이 고집스레 쌓아올린 긍지의 탑은 물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긍지의 이유가 오로지 깐깐한 노인의 "국내 최고령 주방장" 슬로건 뿐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일하는데 요새 젊은 것들 하는 꼬라지...." 등등의 훈계였다면, 그 감동의 크기는 반으로 줄었을 겁니다.

할아버지가 제게 선사한 반절의 감동의 요체는, 내가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긍지, 나는 이러한 '급'의 사람이라는 프라이드란 그 급수 아래의 사람들을 깔아볼 때가 아니라, 자신의 체급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돌아볼 제에야 더욱 찬란히 빛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여든이 다 되도록 주방을 떠나지 않고 고기를 튀기고 소스를 끟여 내던, 그러면서 자신의 나이 절반도 안된 이들이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보고 힘을 내었으면 좋겠노라 이야기하던 돈가스 할아버지...... 지금은 생존해 계시다면 아흔이 넘으셨겠습니다.

검색해 보면 2014년까지는 검색이 됩니다. 수진역 지하상가 식당은 며느리에게 주시고 대치동 은마아파트 지하상가에서 돈가스를 만들고 계셨다는데...... 지금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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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오늘도 건강하셔서 맛있는 돈가스 사람들에게 내놓고 계시기를 바라 봅니다. 혹시 누가 소식 아시면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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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님 기다리던 포스팅입니다!!
글읽고 검색해보니
네이버 블로그에 소식이 있네요
요즘 링크가 말이 많아서 여기에 복붙은 못하겠고
은마아파트 지하상가에도 이제 할아버지는 안 계시다고 합니다ㅠ
그래도 며느리가 계속 장사를 하는 것 같아요
주말에 한번 가보려고요^^
즐겁고 맛있는 포스팅을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 아우 부디 별 일 없으시길,,,, 그래도 워낙 연세가 많으셔서....

물론 당연히 돈가스 이야기 때문에 클릭을 하게 되었지만 부인 되시는 분이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을 홀연히 내려놓고 낙향하셨다는 문구가 제일 기억에 남는군요. 완치율이 높아졌다지만 아내도 최근에 투병생활을 시작해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외국에 살고 있어 먼 이야기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우리 할아버님 어디선가 건강히 돈가스 만들고 계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진정한 장인이시네요.

이름도 엄청나시고!

하하하 그러네요 자그마치 예수님이시네요 ㅋㅋㅋ

와... 이런분들 진짜 한국엔 드물지않나요? 뭔가 일본의 초밥 장인 같은 느낌이네요. 저도 한번 맛보고 싶은데 어디계시던 건강하셨음 좋겠네요.

네 참 드문 분이었습니다.... 검색으로만 봐도 거의 아흔 가까이 일을 하신 듯

보는 내내 왠지모르게 코끝이 찡~ 현재 진행형인줄 알았는데 지금에서야 할아버지의 돈가스에 대해 알게되서 아쉬워요~! 어디서인가 인자한 미소로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계실거라 믿으며, 소설한편을 보는 듯한 '할아버지의 돈까스' @sanha88님 덕분에 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그 며느님이 하시는 돈가스도 맛있을 겁니다.. 언제 한 번 가 보시길

앗...!! 얼마전에 은마아파트 상가 다녀왔는데....
할아버지는 안계시더라도 한번 가서 먹어볼껄 그랬어요...ㅠㅠ
다음기회에.....

멋진 포스팅 감사합니다!
@칭찬해

감사합니다.... 담 기회라도 한 번 드셔 보세요...... 이야기가 있는 맛집은 더 은은한 맛이 있답니다

흥분되는 @sanha88님 안녕하세요! 하니 입니다. 감동적인 @mnsun님 소개로 왔어요. 칭찬이 아주 자자 하시더라구요!! 쏘쿨한 글 올려주신것 너무 감사해요. 작은 선물로 0.6 STEEM를 보내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 받고 넙죽 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돈까스 할아버지 이야기 훈훈하네요

네 저도 오랫 동안 따뜻해졌던 기억이.....

멋있는 분이시네요!
예수님 같은 예수님이시네요!ㅎㅎ
자신을 낮추어도 진정 남보다 위에 계신 분 같습니다.

네 참 보기 드문 '어르신'이셨습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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