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 빨치산 총수 이현상의 최후

in #kr6 years ago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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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정이 맺어진 후 일군의 빨치산들이 지리산 빗점골을 행군해 가다가 사살당한다. 그 가운데에는 전설적인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날짜와 그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국군 부대는 자신들이 9월 15일 이현상을 사살했지만 뒤늦게 그를 확인된 것 뿐이라면서 이현상 사살의 공로는 자신들의 것이라 우겼고, 경찰 토벌대는 17일 밤 교전을 벌인 후 18일 오전 그 현장에서 열 발 이상의 총을 맞은 이현상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현상을 잡지 않고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은 끝나지 않는다”고 이승만이 단언한 이 거물을 누가 잡았느냐의 문제는 사활을 건 논쟁의 대상이 되고 군경합동조사단이 출동하여 '엄정심사'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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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火山)이라는 뜨거운 단어를 아호로 썼던 이현상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서 한평생 자신의 조국의 해방과 자신이 상정한 이상 세계 건설을 위해 견결하게 싸운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일제 하 7년을 채운 감옥살이도, 5년간의 지난한 빨치산 노릇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침착하며 약간 집요한 구석이 있다.”고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의 기록은 틀렸다. 이현상은 ‘약간’이 아니라 뛰어나게 ‘집요’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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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 ‘집요함’은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저열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분명한 코뮤니스트였지만 이론에 투철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표현한 것은 그 단면일지도 모른다. 예리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휘로 여러 번 토벌대에게 참패를 안겨 준 명지휘관이었으나 그는 사실상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일종의 프락치로 입산한 사람을 살려 주자고 주장했다가 그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증오로 점철된 학살을 막아서기도 여러 번이었던 ‘온정주의자’였다.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 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중) 그는 빨치산들의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었고 모두의 ‘선생님’이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투항 빨치산조차 경찰 앞에서 “아이고 선생님”을 부르짖으며 주저앉았으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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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리산에 처음 들어온 계기는 여순 사건이었다. 4.3 사건이 한참 진행 중인 제주도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14연대의 좌익들이 “동포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순천에 도착한 이현상 앞에는 무려 천 여명의 시신이 쌓여 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은 하사관들이 봉기를 일으키자마자 살해해 버린 14연대의 장교들 중 상당수가 남로당 중앙당 소속의 조직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사관들은 지방 도당 소속으로 장교들의 정체를 알 리가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들의 ‘동지’들의 씨를 말려 버린 셈이었다. 피를 본 하사관들은 우익에 대한 잔인한 복수를 시작했고, 그 결과는 천 여구의 시신이었다. 이현상은 부르짖는다. “이건 당적 죄악이고 당적 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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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제대로 된 전략과 계획 없이 우발적이고 단말마적인 봉기로 스스로의 역량을 갉아먹은 것에 대한 통탄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확신 속에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들이 버젓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질타였고, 용감한 섣부름과 정의로운(?) 잔인함이 빚어낼 결과에 대한 탄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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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에서 대중적 지지도가 우익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좌익은 여순 사건과 비슷한 류의 실수를 거듭하며 스스로의 운신의 폭을 좁혔고, 결국은 그 댓가를 치러야 했다. 우리들이 옳다는 확신은 조급함을 불렀고 조급한만큼 과격해졌으며, 그 과격의 폭만큼 지지는 외면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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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은 자신의 진영이 저지른 과오를 뼈아프게 지적하면서도 종국에는 그 상처에 책임을 졌던, 우리 현대사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그리 흔하지 않은 인물 중의 하나였다. 여순 반란군을 인솔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태백산맥을 종주하며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남쪽에 서 제2 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 하나에 서슴없이 걸음을 되돌려 남하한 것은 범연한 인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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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그와 그의 부대는 북으로부터 외면받고 남으로부터 저주받는다. 그들을 데려가라는 미군의 요구에 북한은 묵묵부답이었고, 이승만은 “이현상을 죽이지 않고는 지리산에 평화 없다.”고 선언하며 그와 그의 동료들을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도록 몰아갔다. 심지어 북한에서 벌어진 남로당 숙청의 여파 속에 이현상은 평생을 바친 당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당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북한에서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이들이 미제의 프락치로 몰려 목이 매달리는 판에, 이현상의 '강등'도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를 죽인 총알이 국군도 경찰도 아닌 빨치산 내부의 소행이라는 의심까지 제기될까.

전쟁이 끝난 해의 가을. 아무 것도 기대할 것도, 기댈 것도 없이 죽어가야 하는 것이 숙명과도 같았던 나날에, 가을 깊어가는 지리산 능선에서 그가 바라봤던 달빛에는 어떤 풍경이 스치고 지나갔을까. 그에게 그 전쟁은 무엇이었을까. 그 생애는 무엇이었을까.

1992년 방송됐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주인공 최대치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김기문(이정길 분)의 입에서 나왔던 대사를 들으면서 나는 이현상을 떠올렸었다. 그 대사를 일부 옮김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 화산 이현상의 마지막 날을 기려 본다. 김기문이 최대치에게......

"후회는 안해. 절대로 후회를 해서는 안돼 알겠나. 때로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과연 역사란 발전하는 것일까. 나와 이 역사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그러나 후회를 해서는 안돼...... 자네도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우리같은 사람이 있어서 역사는 발전하는 거야. 그럼 후회할 게 뭐 있어. 질문 같은 건 몇 십년 뒤에 편안한 세대에 사는 후세들이 하면 되는 거야."

몇 년 전 지리산 깊은 곳에서 빨치산 비트가 발견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전선이나 스피커, 그리고 무선 통신에 사용된 듯한 폐전지를 비롯해 옛 빨치산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무더기로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등사기와 함께 발견된 잉크였다.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잉크는 마르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트의 주인은 박영발. 바로 이현상을 강등시키고 지휘권을 박탈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잉크의 주인 박영발은 저승에서 이현상을 만나 무슨 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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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는 아이러니함 그 자체죠. 애초에 친일 세력들이 해방이후 그대로 정권을 잡은게 가장 큰 과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피로 ㆍㆍㆍ
종전 후 토키몰이 죽움의 운명에서 강등까지당했군요

즐거운 추석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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