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

in kr •  11 days ago

1924년 9월 5일 최초로 한국인이 만든 극영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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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영화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대답은 <아리랑>이 제일 많을 것이다. 물론 나운규의 <아리랑>이 한국 영화사에 금자탑으로 기록될 만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최초'의 타이틀을 차지하기엔 너무 늦게 나왔다. 최초의 한국 영화라면 대개 1919년 10월 27일 상영된 <의리적 구토>를 든다. 그래서 10월 27일이 영화의 날로 기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본격적인 극영화가 아니었다. 또 최초의 조선인이 만든 영화라 할 <월하의 맹서>는 조선 총독부 체신부 홍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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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20년대에는 경성 시민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의 맛을 보고 있었기에 본격 극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조선의 초보 영화팬들을 열광시킨 극영화가 등장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바로 우리의 고전 <춘향전>이 영화화된 것이다. 그런데 좀 아쉬운 것은 그 감독이 하야카와 고슈라는 일본인이었다는 점이다. 변사 김조성이 활약하고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무려 15만 명이라는 대단한 관중을 동원하며 빅히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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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란한 흥행을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박승필이라는 사람이었다. 일찌기 광무대라는 극장을 인수하여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모으는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던 수완을 발휘한 바 있는 그는 전국 순회 공연을 나선 길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단원들과 함께 장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 1917년 일본인으로부터 단성사를 인수한 그는 그곳에서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여 굉장한 환호를 받기도 했지만 일본인 감독의 <춘향전>을 보면서 떨떠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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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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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춘향전을 왜놈의 자식이 감독하고 난리야. 거기다 입장료는 다른 공연의 몇 배인 1원을 받아 처먹어도 조선 사람들이 줄을 서네? 에잇 퉤..... 이 배알도 없는 사람들아. 조선 총독부가 개최한 부업공진회 (박람회 같은) 에 때맞춰 만든 거란 말이다. 에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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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승필은 사업가일 뿐, 프로듀서나 촬영 감독이 아니었다. 여기서 당시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 등장한다. 그는 극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설랑 일본에 가서 촬영 기사로 일하다가 관동 대지진을 만나 조선으로 돌아와 있던 촬영 기사 이필우를 염두에 둔다. 이필우는 오케이를 했지만 박승필은 역시 사업가, 검증 안된 찰영 기사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었고 그는 일단 이필우에게 동아일보 주최 정구 대회를 한 번 촬영해 와 보라고 한다. 이필우가 촬영해 온 필름을 보고서야 박승필은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영화가 크랭크인된 것이다. 무슨 영화였을까? 바로 애들이 보기에는 무서운 동화지만 끈질기게 요즘 애들에게도 보여지는 <장화홍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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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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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전속 성우 최병룡과 우정식이 장쇠 역과 사또 역을 맡았고 장화와 홍련 역에는 광무대에서 활동하던 김옥희와 김설자, 그 외 배역 역시 단성사 직원들이 각각 담당했다. 로케이션 장소는? 지금도 고대 앞에 있는 개운사 (당시는 영도사)였다. 그때만 해도 한적한 교외(?)였을 이 절에서 배우들은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촬영을 했다. 최종 완성된 필름은 총 8권 분량으로 영사시간만 2시간가량이었다. 이 영화가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평소 10전하던 관람료를 50전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평일 주야로 2회 상영에 9일간 장기 상영했다. 당시 활동사진관에서는 5일마다 필름을 교체했으며 일요일에만 주야 2회 상영일 뿐, 평일은 야간 1회 상영이 전부였다." (오마이뉴스)

특히 여성관객들이 엄청나게 몰렸다고 하는데 이는 단성사 변사 김영환의 유장한 진행 덕분이었다고 한다. "아 이 한을 어찌 갚으랴 장화와 홍련이는 오뉴월에 서릿발이 내릴 듯이 이 악물고 죽어갔던 거디었다~~~~" (실제 내용과는 관련없음) 당시의 신문은 이렇게 장화홍련전을 치하한다. "비록 영화의 스케줄이 웅대하지는 못하였으나 사진 전편을 통해서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박승필은 이후 나운규가 '나운규 프로덕션'을 차리고 영화를 만들어 낼 때 그 물주이기도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영화 사업이란 도박과 비슷해서 흥행의 부침에 따르는 희로애락을 골고루 겪다가 1932년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었을 때 윤백남이 읽은 조사 가운데에 이런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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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하여 피 흘리다 화살이 다 떨어져 명예의 전사를 하고 말았다." 즉 윤백남은 그의 죽음을 '전사'로 해석했다.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조선 땅에서 조선의 영화를 만들고자 애썼고, 조선 영화 발전에 힘쓰다가 결국 힘 다하여 쓰러진 것으로 그 죽음을 읽었던 것이다. 단성사는 최초의 단성사 장(葬)으로 18년간 자신의 주인이었던 고인을 보낸다.

1924년 9월 5일.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영화가 태어난 날. 그로부터 88년을 하루 못 채운 2012년 9월 4일 베니스에서는 한국 감독의 영화가 그랑프리의 기대를 안고 공식 상영되고 있었다. 그게 <피에타>다. 문득 생각하면 재미있지 않은가. 짖궂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한 역사의 장난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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