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옥 그 애매한 이름.

in #kr6 years ago

1960년 2월 15일 조병옥, 그 애매한 이름

1960년 2월의 어느 날, 추어탕집으로 유명한 용금옥 사장 할머니는 문을 일찌감치 닫아 걸었다. 이 집은 정계와 언론계, 문화계 등 각계 인사들이 득시글거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판문점 휴전 회담 중에도 월북했던 북한 대표단 중 하나가 이쪽 기자들에게 틈만 나면 “용금옥은 잘 있소?”라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 식당의 사장이 한 명의 부음을 듣고 문을 닫아 건 것이다.

“무슨 야로가 있어. 어떻게 그렇게 강건하던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밤새 그녀는 술 마시며 눈물을 흘렸다. 고인이 된 사람은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가기 전날 용금옥에 들러서 추어탕 두 그릇을 말끔히 비웠었다. 그래서 사장이 “어디가 아파서 미국까지 가시오?”라고 타박을 준 터였다.

그 강건하던 사람은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용금옥 주인 뿐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한탄했다. “이승만 박사 기가 엄청나게 세긴 세구나.”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급서했다.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호남선에서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허무하게 죽어 버리더니, 이번엔 호랑이같이 이 골 저 골을 뛸 것 같던 조병옥이 맥없이 명을 다했으니 이승만의 기가 세다는 말이 나올 밖에.

그는 대통령 후보를 두고 민주당내 파벌 싸움이 극심하던 시기, 경쟁 포기 선언을 함으로써 그 분위기를 일신시켰고 극적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경쟁 후보 장면과는 단 3표차였다. “빈대 잡자고 초가 삼 칸 태울 수 없다.”는 사려 깊은 신조는 지금도 그의 생가 앞에 그를 기념하는 문구로 남아 있거니와, 그는 그의 성명대로 “1인 정치를 지양하고, 쓰러진 민주주의를 소생할 수 있는 정치 추수기가 다가왔을 때” 그를 감당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한몸에 받던 사람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그의 몸에 이상이 있고 미국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는 5월에 예정되어 있던 선거를 3월로 앞당겨 버렸다. 그게 3.15였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는 천안 사람이다. 천안이라면 떠오르는 건물은 독립기념관이고, 천안 하면 연상되는 인물이라면 유관순일 것이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동네 오빠 동생으로 자랐다. 조병옥의 나이가 여덟 살 정도는 위였으니 친구로 지내지는 못했겠지만.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를 주동한 사람 중에는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원도 끼어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광주학생운동 때 신간회 간부로서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여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3년을 콩밥을 먹는다. 그리고 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산다.

개인적으로 조병옥을 ‘친일파’로 분류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의 친일 연설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국내에 남아 있던 유명 인사로서 그 정도 행각을 ‘친일’로 규정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다. 적어도 조병옥은 다른 우익 인사들에 비해서는 깨끗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한국 현대사에서 그의 입지를 조명할 수 있는 단어는 ‘친일파’라기보다는 ‘친미파’일 것이다.

조병옥은 유학 이후 “유물론적 변증법 같은 일개 이데올로기로 지상낙원을 일굴 수 있다는 것은 허위이며, 사회진보적 원리의 핵심은 ‘개조’이지 ‘혁명’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해방 이후 좌익과의 대립에서 그는 그 확신을 극단적으로 발휘한다.

후일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일반 민주주의자로서 “빈대 잡겠다고 초가 삼간 태울 수 없다.”고 한 신중론자는 적어도 해방공간에서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일방 통행 표지판을 강요하고 따르지 않는 ‘빈대’들을 불사르는데 거침이 없는 강경론자였다.

미 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좌익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그가 한 일은 친일 경찰의 대거 활용이었다. 해방 이후 나다니지도 못하고 집에 숨어 있던 일본 경찰 출신들, 북한에서 맞아 죽을 위기에서 겨우 탈출해서 남한으로 기어내려온 악질 고등계 형사들이 조병옥 아래에서 견장을 회복했다. 그들의 횡포와 발호는 잇단 민중 봉기의 원인이 되거니와 그 사실을 따지는 여운형과 김규식에게 조병옥은 이런 식으로 대든다.

“여운형 선생. 당신도 고이소 총독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할 거 다 했잖아. 김규식 선생. 당신 아들이 일본 해군 스파이였던 거 나 알고 있다고!”

그는 “진짜 친일파”와 “먹고 살기 위해 친일했던 부류”로 구분했지만 그가 일생의 적이라 할 좌익과의 싸움을 위해 사실상 그 기준을 사장시켰다. 그리고 오른쪽의 극단에서 그 왼쪽에 있는 모든 이를 적으로 돌렸다. 제주 4.3 항쟁 당시 미 군정장관 앞에서 빨치산과의 협상을 진행하는 등 평화적 해결을 도모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의 자식’이라고 매도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전쟁 때 내무부 장관을 맡은 그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대구에 남아 있었다. 대구 시민들은 도청에 가서 조병옥의 차를 확인하고 아직 “조 장관이 대구에 있네. 피난갈 필요가 없다.”고 돌아갔다. (이게 언젠가 그 아들 조순형이 대구에 출마하면서 끌어왔던 부친과 대구와의 인연이다)

최소한 자신의 신념에 책임을 지는 모습은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인민군에 맞서서 백척간두의 방어전을 치르는 한편으로 그의 지휘하의 경찰과 청년단들은 원래 “동방의 모스크바”로 유명했던 대구의 좌익들을 트럭 수백 대에 싣고 경산 코발트 광산의 폐광으로 데리고 가서 모조리 학살한다. “올 때는 트럭 가득, 나갈 때는 빈 트럭”. 그리고 그 유골들은 21세기까지 동굴 속에 묻혀 있었다.

울트라 라이트에 해당했던 조병옥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즉 조병옥이 신봉하던 형식적 민주주의마저도 짓밟은 ‘초 울트라 나이스 캡숑’ 오른쪽 이승만 앞에서는 고개를 흔들 수 밖에 없었다. 국무회의 때 유일하게 이승만 앞에서 다리 꼬고 담배 피우던 강단을 발휘하면서, 그는 야당의 선봉장으로 나선다. 조병옥과 이승만이 맞선 1960년을 돌아보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얼마나 울퉁불퉁했는지가 보인다.

해방 공간에서 결국 살아남은 것은 그들처럼 극단적으로 오른쪽에 서 있었던 사람들과 그 적수로서 섣부른 봉기로 제 피를 보거나 ‘국토 완정’을 부르짖은 왼쪽의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 5년은 그 가운데의 영역이 하얗게 지워져 가는 과정이었고, 전쟁은 모든 것을 깡그리 사라지게 했다. 그 싹쓸이의 무대 위에서 조병옥은 이승만의 호적수가 되었고 이승만을 물리쳐 달라는 비원(?)을 안고 죽어갔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1960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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