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백선생', 백남봉

in #kr6 years ago

-후배에게 편지 쓰듯 한 글이라 반말체입니다..... 누가 물어 보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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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9일 백남봉 선생 가셨다.... 또 하나의 백선생

‘백 선생’이라는 호칭은 나에게 두 명을 떠올리게 해. 한 분은 당연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노래의 작사자이자 수십 년 동안 진보의 ‘어른’으로 활약하고 계시는 백기완 선생님이지.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처음 그분을 보면서 나는 그분이 환갑은 훨씬 넘어 고희에 가까운 줄 알았어. 백발을 인 얼굴에 깊은 고랑을 팠던 주름은 그렇게 보이기에 넉넉했지만 그건 세월 탓이 아니라 그분이 살아온 험한 인생 탓이었다고 봐야겠지. 하여간 그분을 안 이래 ‘백 선생’ 하면 당연히 그분이었는데 취직한 이후 또 한 명의 백 선생이 생겼어. 코미디언 백남봉 씨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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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봉.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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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달린다>라는 로컬 프로그램 조연출을 하느라 사무실과 편집실을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던 무렵이었어. (조연출은 촬영을 못나갔다 흑흑) 어느날 편집실에 들어갔더니 앗 TV에서 보던 분이 떡 하니 앉아 계시는 거야. 비록 연예인에는 별 관심없음을 자처하며 그래서 교양 PD를 하겠노라 농담반 진담반 하던 처지였지만 일터에서 연예인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 화들짝 놀랐지. 그때 튀어나온 소리가 무례하게도 “어 백남봉......”이었어. 그때 홱 나를 쳐다보던 매서운 눈빛에 나는 가까스로 ‘선생님’을 붙이며 위기를 벗어났다. 서..... 선생님. ‘백선생’은 당시 팀내 공식 호칭이었고 나는 또 한 분의 백선생을 알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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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할 때 또 한 번 놀랐다. 분명히 백남봉 선생의 이름이 떠야 하는데 웬 ‘박두식’이라는 다소 도시스럽지 못한 이름이 등장하는 거야. 전임 조연출에게 물어 봤더니 심드렁한 대답. “그게 백선생 본명이야.”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백명의 난봉꾼과 맞먹는다”는 뜻으로 한 코미디 작가가 지어 준 거라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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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과 단짝으로 프로그램을 만드셨던 분한테서 그 분의 과거 고생담을 꽤 많이 들었다. 원래 고향은 전라도지만 다섯 살 때 평안도 진남포로 이사가서 거기서 자랐고 전쟁통에 피난와서는 각지를 떠돌다가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나왔다고 해. 그 와중에 껌팔이,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수 등등 안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해. 언젠가 술자리에서 고기 못 굽는다고 혼난 다음 백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게 기억이 난다. “난 뭐든 잘해야 했어, 밥 한 술 얻어먹으려면 민하다 둔하다 소리는 절대로 안들어야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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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팔도의 말투를 익혔어. 사투리 연기는 여느 배우나 하지만 그 말투의 요체를 파악하고 그 지방 사람들에게 먹힐 만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밥 한 술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 그는 조선 팔도 안에서는 ‘멀티링규얼’이 될 수 있었지. 기민하게 말을 배워야 했고 능숙하게 구사해야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 백남봉은 이 사투리 연기를 하다가 한 정치인의 눈에 띄고 그 소개로 극단에 입단하면서 코미디 인생을 열어. 또 후일의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이자 동료가 되는 남보원에게 한 번 깨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

백남봉남보원.jpg

남보원은 백남봉보다 나이도 많고 연예계도 먼저 입문한 선배 격이었지. 하루는 남보원이 무대에 올라 사투리 연기를 펼쳤는데 관중들 반응이 너무 썰렁한 거야. 급 당황해서 내려와서 영문을 알아보니 바로 앞에 백남봉이 땜빵으로 올라와서 사투리 연기로 사람들 배꼽을 다 빼 놨던 거야. 남보원은 백남봉을 부른다. “너 내 앞에서는 사투리 연기하지 마!” 이걸로 끝나진 않았겠지? 뭐 “또 하면 확 그냥....” 정도는 곁들여졌겠지. 하지만 그걸 인연으로 둘은 둘도 없는 원맨쇼 콤비로 인기 절정을 구가하게 된다. 둘이 뱃고동 소리 갈매기 소리 내면서 부산항구 묘사하던 모습은 기억에 선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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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선생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어. 어떤 기사에는 딸 하나만 있는 걸로 나오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 딸은 늦둥이고 1남 1녀가 더 있는 걸로 알아. 자세한 가족사는 모르지만. 그런데 백 선생의 부인 이옥순 여사는 그 내조가 특출하기로 정평이 있었어. 성격 또한 괄괄하기로 이름났던 부인은 극단 시절 남편이 못받은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단장과 담판을 짓기도 했던 여장부였고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남편이 바람 피운 얘기를 쾅쾅 토해 내 천하의 백남봉의 얼굴을 백짓장으로 만들기도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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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뵈었던 백선생의 성정은 그렇게 잔잔하고 온화한 편은 아니셨어. 고기 못 굽는다고 왈칵 하실 때나 뭔가 맘에 안들 때 스윽 훑어보는 눈빛은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백선생을 부인은 휘어잡았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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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다 보니 백 선생은 자문자답하는 버릇이 생겼대. 상대에게 뭔가를 물어놓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는 자기가 알아서 대답을 하고는 대화를 이어가는 매우 좋지 않은 버릇이었지. “남편 잘 계세요?”라고 물은 뒤에 “아 요즘도 그렇게 짠돌이로 지내서 속 박박 긁는다구요? 그럴 때는 말이죠.” 라고 이어가는 거지. 그 버릇을 기어코 고쳐 놓은 게 아내였다는군. 양어깨를 치켜들고 걷는 양아치 걸음걸이를 교정한 것도 아내였고 말이야. 우리는 알지. 남편의 버릇 하나를 고치는데 얼마만한 공과 땀과 시비와 고성이 오가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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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봉 선생도 아내의 그런 면을 무척이나 고마워했어. 그건 그분이 늘그막에 낸 앨범 중의 한 노래 가사를 보면 읽혀진다. 김광석의 <어느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처럼 가슴 밑바닥을 확 긁는 느낌은 아니어도 백남봉이라는 코미디언의 솔직한 마음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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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걸어온 길은 험하고도 먼 길이었소. 웃음 뒤에 감춰진 나의 눈물은 외로움의 몸짓이었소.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세월이 한없이 아쉬웁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해주는 당신이 곁에 있네. 설레는 가슴을 이렇게 달려왔다오, 이렇게 달려왔다오. 술잔 속에 채워진 나의 눈물은 외로움의 손짓이었소. 구름처럼 떠돌던 지난 세월이 때로는 그리웁지만, 황혼의 길 떠나야 하는 외로운 나그네 되어, 웃음의 씨를 뿌리며 한평생 살아갈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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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여의도에서 백선생과 조우했을 때 그분은 보기에도 민망한 자전거 바지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계셨지. 평생 함께 하던 담배도 끊고 당뇨 잡기 위해 자전거를 타면서 매니아가 됐던 그분은 나에게 “젊은 사람이 그렇게 살쪄서 어떻게 해?"하며 핀잔을 주셨지. 그런데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4년 전 7월 29일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 들었을 때 이렇게 세월은 가고 사람들은 죽는구나 하면서 처연하게 과거를 추억하던 기억이 난다. 임종 무렵 백남봉 선생은 아내에게 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대. 그리고 그는 이렇게 썼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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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미안해. 이승에서 다시 못보면 저승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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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아내에게 그럴 염치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말할 때 아내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백선생은 꽤 잘 살다 간 남자가 아닐까 싶어. (이건 너무 내 기준인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그분이 언젠가 토해 놨던 익살 한 자락으로 그분을 추억하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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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돌듯 뭐든 돌려야 합니다. 부부도 실은 모난 돌끼리 만나 서로 둥글게 돌리며 사는 것 아닙니까. 선풍기도 돌려야 시원하잖아요. 나이 생각하지 말고 자꾸 돌려야 건강해집니다. 저는 죽어도 안 죽을 테니, 여러분들도 죽어도 죽지 마세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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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해 살다가신 분, 웃음을 선사하신분,
남을 위해 대변하신 운동가 우리곁에 이런분들이 계시기에 민주화도 이루었고 생동감이있는 삶을 살수있지않을까.......

옳습니다.... 동의합니다.

그것이 뭐든, 잘해야 했던 세대가 떠나가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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