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과 걸인

in #kr4 years ago

걸인과 귀인
.
저녁 먹는데 꼬막 찬이 나와서 떠오른 옛 생각.
.
찢어지는 가난이나 엄청난 실패, 계속되는 좌절을 딛고 인생역전을 이룬 사람들을 다룬 프로그램을 맡아 다양한 ‘성공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다르고 업종도 제각각이라 그 스토리가 천차만별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 성공담 속엔 공통되는 특징 몇 가지가 발견됩니다.
.
첫째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로 성공의 발판을 닦았습니다. 좋아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만큼 보인다는 것이죠. 그리고 둘째, 과도한 욕심은 독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더군요. 왜냐면 그들 태반이 이른바 ‘잘나갈 때’ 더 잘 나가 보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패가망신 직전까지 가 본 경험이 있었거든요. 셋째, 그들에게는 항상 ‘귀인’이 있었습니다. 점집에 가면 ‘동남방으로 가면 귀인을 만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인생이라는 사막의 오아시스같이, 풍랑 속에 만난 등대같이 그들의 인생을 수렁에서 건져 준 귀인이 그들의 막다른 골목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
신길동에 있던 한 대박 해물탕집 주인도 그랬습니다. 그 양반은 위 세 가지 특징을 몸으로 겪고 맘으로 다지고, 필생의 기억으로 삼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죠.
.
우선 그는 해물탕을 너무도 좋아해서 결국 해물탕 냄비 안에 자신의 인생을 실어 버렸습니다. 부부가 모두 해물탕을 즐긴 관계로 맛있는 해물탕집이 있다면 거리불문, 가격불문 찾아다니면서 맛을 보던 중 “우리가 해물탕을 해 보면 어떨까?”라는 데 의기투합을 했고 급기야 해물탕집을 차렸답니다. 즉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이기까지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

“내가 얼마나 개념이 없었냐 하면요. 하루는 손님이 항의를 해 와요. 해물탕 조개에 흙이 들어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조개를 잘 안씻은 거지. 나는 그 생각은 안하고 손님한테 그랬다니까. 여보세요 조개가 뭘 먹고 삽니까? 뻘 먹고 삽니다. 그러니 뻘흙 있는 건 당연하잖아요.”

.
그 말을 들은 손님도 꽤나 개념이 없는 손님이었던지 아니면 너무도 당당한 주인의 기세에 눌렸는지 아 그래요? 하고는 양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 해물탕을 깨끗이 비우더랍니다. 그렇게 ‘무댓뽀’로 덤비던 장사였지만, 그 패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달리 손님들에게 싹싹하게 대하고 단골을 정성스레 챙겼다는 아내 덕분인지 장사는 번창 일로를 걸었다지요. 그렇게 무난히 잘 나갔으면 웬만한 동네 해물탕집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었을 텐데 남편이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

“이왕 하는 거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한 번 통크게 놀아보자 해서 서초동에 80평짜리 해물탕집을 차렸지요.”

.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통크게 ‘한 번 지르는 것’을 멋있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 ‘한탕주의’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
그러나 그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금기를 어겼고 댓가는 쓰디 썼습니다. 화려하게 문을 연 지 2년만에 그간 모았던 수억의 전재산을 털어 넣었던 그 80평짜리 식당에서 손 탈탈 털고 쫓겨 나와야 했던 겁니다. 순항하던 거함의 선장이 뗏목에 가까스로 올라탄 채 자신의 피땀 어린 배가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었겠지요.
.

그때 아내가 “그래도 이 직업에는 정년이 없지 않느냐”면서 절망하는 남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답니다. 그리고는 죽으나 사나 살 길은 해물탕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금싸라기 땅 서초의 꿈을 저만치 밀어낸 다음 영등포구 신길동에 또 해물탕집을 차렸습니다. 아마 이쯤에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에이 마누라가 귀인이었구나.”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그에게 진짜 귀인이 나타난 것은 그 후였습니다.
.

경기가 형편없이 어려워지고 거리에 부쩍 걸인들이 늘었던 무렵, 가게 인근에도 그 일단의 걸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밥 달라고 식당 앞에서 진을 치는 그들이 손님을 쫓을까 저어되기도 하고, 남루한 형편들이 불쌍하기도 하여 몇 상을 따로 차려서 그 걸인들을 먹였다지요. 거기에 해물탕이야 올라가지 않았겠지만 밑반찬들은 풍성히 올렸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는데 어느날, 그들이 물린 상을 무심코 보던 중 주인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

밥 한 톨 남김없이 말끔히 먹어 치워진 밥상이었지만 유독 꼬막 접시는 차려줄 때와 거의 변함이 없이 온전하게 남겨져 있는 겁니다. 한 상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상을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젓가락을 대기는 했는데 한 두 번 째각거린 건 이상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었지요.
.
도대체 이유가 뭘까, 유독 꼬막이 맛이 없었을까 궁금해 하던 양만호씨는 걸인의 밥상에 남겨진 꼬막을 한 입 두 입 베어 물었습니다. 잘근잘근 꼬막 몇 개를 씹어 본 다음에야, 그는 비로소 꼬막이 “아주 미세하게, 완전히 맛이 간 건 아니지만 조금은 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걸인들 역시 몇 젓가락 주워 먹다가 그 느낌을 받았고 더 이상 꼬막에 손대지 않고 물려 버린 겁니다. 그 순간 주인의 머릿 속에는 번갯불 하나가 번득이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이후 그의 평생 신조가 되어 버린 말 한 마디였습니다. “임금 눈과 귀는 속일 수 있어도 거지 입은 속이지 못한다.”

.
감언이설과 속임수를 써서 임금님 눈과 귀를 막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미세하게 상한’ 꼬막은 제대로 된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걸인들의 혀조차 속일 수 없었던 겁니다.
.

“사람 입맛처럼 정직한 게 없다는 걸 전 그때 정말 무섭게 배웠어요. 못먹고 못사는 거지가 저러는데 돈 내고 밥 사먹으러 온 손님들의 입이 얼마나 무섭겠느냐. 생각만 해도 덜덜 떨리더라구요. 조개가 뻘 먹고 사니 흙 있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장사한 거 생각하면 그냥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더라고.”
.
그 이후 주인은 항상 걸인의 밥상에 수북이 쌓여 있던 꼬막을 가슴 속 깊이 담아 두고 장사를 했더랍니다. 그에게 사람의 정직한 입맛과 그를 만족시키는 충실한 음식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준 귀인의 충고로 새기고 말입니다. 오늘날 번창하는 가게의 생명같은 교훈으로 삼고서 말입니다.
.
그 이름 모를 걸인은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귀인이 된 겁니다.

.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에둘러 말하면 누구나 자기 인생에 귀인을 만날 기회도 그쯤은 있겠지요. 하지만 그 귀인 역시 스스로의 노력 없이는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지도 모릅니다.
.
만약 주인이 수북이 쌓인 채 되돌아온 꼬막 접시를 보고 “배부른 거지들이구만. 내일부터 꼬막 올리지 마! 이 사람들이 음식 아까운 줄을 몰라!”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으면 그는 그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테고 걸인은 걸인으로 끝났겠지요. 하지만 걸인의 밥상에 젓가락을 대고 맛을 본 그의 노력이 결국 일생의 귀인을 만나게 된 행운의 이유가 되었다 싶기도 합니다.
.
결국 귀인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는 거겠지요.

FB_IMG_1592638303526.jpg

Sort:  

좋은 글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읽어야 할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6
JST 0.030
BTC 62984.33
ETH 2453.70
USDT 1.00
SBD 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