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로 모래시계를 보다 - 아듀 김종학
아듀 김종학 – 여명의 눈동자로 모래시계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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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먼저 보고 오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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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세상에 들어온 뒤 일찍이 접하지 못했던 수많은 드라마를 섭렵했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어두운 밤 모니터 앞에 턱 괴고 앉아 훌쩍이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되더군요. “남자가 늙으면 여성 호르몬이 나오는 게 맞나 봐.” “왜 그런 소릴 하니?” “아빠가 드라마 보고 울고 있더라고.” 여성 호르몬 때문이 아니라 본디 나의 감성이 풍부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해 봤으나 별로 먹히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여러 모로 심금을 울리고 누선을 자극하는 (신파가 아닌) 감동과 재미 넘치는 드라마 참 많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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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 네 인생 드라마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치면 저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명의 눈동자>라구요. 저는 이 드라마 자체가 거대한 파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방송가의 독종으로 소문났던 김종학 감독은 이 드라마에서 여러 개의 금기를 박살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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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 이전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뽀뽀신은 몰라도 키스신은 없었습니다. 행여 비슷한 장면이라도 나올라치면 <시네마 천국>의 신부님처럼 종을 울려대는 방송위원회나 공륜의 호들갑이 가로막았죠. 하지만 일본군으로 끌려나온 남주인공과 위안부로 끌려온 여주인공이 절박한 이별을 맞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다급하게 입맞추던 그 장면을 두고는 누두고 ‘야하다’고 타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의는 받았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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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 서로 죽고 죽였던 좌우익의 역사가 방송을 탔고, 그 갈등이 해방 뒤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보여 줬으며 친일파가 득세하고 마땅히 단죄받아야 할 이들이 사회의 지배층을 형성하는 과정을 치떨리게 묘사했고, 4.3이나 보도연맹 등 그때껏 지하에 묻혀 있던 현대사의 아픔들을 넝쿨 캐내듯 캐내 드라마 회차마다 널어 놓았죠. (물론 송지나 작가의 힘이 김종학 감독의 역량만큼 대단했으니 가능한 일일 겁니다마는)
또 <여명의 눈동자>에는 판에 박힌 선과 악, 이념과 인간의 대결로만 치부되던 2차원적 대립을 넘어, 입체감을 불어넣은 풍부한 인물들이 가득했습니다. 북한에 스파이로 침투한 하림을 돕는 명지(고현정 분)와 같이 “그냥 그 주의가 싫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공산주의, 무슨 사상, 무슨 주의. 사람 빼고 사상만 있는 게 난 싫어요”라며 이념에 대한 환멸을 토로하는 인물도 있었고, 주인공 대치의 사상적 스승이라 할 김기문(이정길 분)처럼 인간적인 공산주의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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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드라마 속에서 ‘다양한’ 면모의 빨갱이들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기존의 악의 화신 같은 캐릭터에서, 동지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알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지닌, 그러나 단단한 신념을 고수했던 ‘착한 빨갱이’들까지도 말입니다. 드라마 종영 이후에도 즐겨 대학가 술자리에서 암송됐던 김기문의 대사는 그 봉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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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일까? 나와 이 역사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후회를 해서는 안 돼. 자네도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역사는 발전하는 거야. 그럼, 후회할 게 뭐가 있어. 질문 같은 건 몇십년 뒤에 편안한 세대에 사는 후세들이 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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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여명의 눈동자에는 주옥같은 명대사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줄줄 꿸 수 있는 대사들이 지천이었지요. 이 드라마 하나만으로 제게 김종학 감독은 영원한 리스펙트의 대상입니다. 그의 기일..... 그를 추억하는 영상을 만들면서 다시금 가장 화려했던 그의 90년대를 돌아봅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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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밀(?) 하나. 음악 저작권이 무서워서 이 영상의 <여명의 눈동자> 주제곡 (이것도 사실 영화 <드레스드 투 킬>의 완전 표절이면서.. 치)을 가져다 쓰지 못해서... 제가 직접 쳤습니다. 엉터리 연주지만 어쨌던 Piano by 산하입니다..... 간만에 피아노 치느라 손가락 부러지는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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