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친 지도자들 3- 필리핀의 마르코스

in #kr4 years ago

나라를 망친 지도자들-3 필리핀의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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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래 수백 년간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나 꾸준히 독립투쟁을 벌여온 필리핀 사람들은 19세기 말 스페인이 신흥 강국 미국과 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서 1898년 6월12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필리핀공화국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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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립선언의 무대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필리핀 국기가 처음 선보였지. 이 국기는 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했어. 평소에는 파란색이 위쪽에 있지만 나라가 전쟁에 휩싸이면 용기를 상징하는 붉은색이 위쪽으로 올라갔던 거야. ‘전시의 깃발’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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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한 필리핀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전시의 국기를 휘날려야 했어. 스페인을 무찌른 미국이 이제는 자신이 필리핀의 주인이라면서 군대를 들이밀었으니까. 필리핀공화국 군대는 전시 국기를 휘날리며 용감히 싸웠지만 장비 면에서 월등한 신흥 강국 미군에 철저히 짓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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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인들은 무자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남자고 여자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반군 포로와 단순 체포자, 반군 적극 가담자와 반군 의심자를 가리지 않고 10세 이상이면 다 죽여버린다. 씨를 말리려고 작정한 것 같다”라는 미국 기자의 고발을 들어보면 그 참담함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수십 년 뒤 또 하나의 침략군 일본군이 열도를 장악했을 때도 수많은 필리핀인들은 전시 국기를 휘날리며 오만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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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시달리면서도 필리핀인들은 많은 것을 쌓아 올렸지. 아시아에서 최초로 수립된 공화국의 긍지, 주권과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역사, 당당한 국민교육 수준과 낮은 문맹률, 시민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강력한 시민단체, 뿌리 깊은 지방자치의 전통 등 당시 아시아 어느 국가도 갖추지 못한 장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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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지도자들도 있었다. 독립 영웅 아귀날도가 있었고 ‘정의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공명정대했던 마누엘 케손 같은 정치인도 나왔지. 특히 청렴결백의 상징 같은 인물로서 가족은 물론 측근에게조차 어떠한 특권도 허용하지 않았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오늘날까지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어. 이러니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내가 제일 잘나가’를 노래할 수 있었던 건 당연하지 않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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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1966년 기준 필리핀의 국내총생산(GDP)은 63억7100만 달러였다. 당시 한국의 GDP는 39억2800만 달러에 불과했다. (···) 1966년 태국(타이)의 GDP는 52억7000만 달러, 말레이시아 GDP는 31억4400만 달러였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였다(〈머니투데이〉 2019년 3월11일 ‘아시아의 부국(富國)은 왜 가난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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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필리핀에 암운을 드리운 건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1989)였어. 첫 임기는 그럭저럭 마쳤지만 1969년 재선 뒤부터 필리핀의 행보는 꼬이기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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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필리핀 공산당이 창당됐고 1969년에는 폭력적인 게릴라 성향의 정치집단이 생겨났다.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테러 공격과 암살 시도를 거짓으로 꾸미고, 이 국가적 위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반대 세력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신문사와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시켰으며 군과 경찰에 막강한 권력을 주었다(마빈 조니스 등, 〈빅맥이냐 김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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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가 이 계엄령을 해제한 건 1981년이었어. 무려 9년이나 이어진 계엄령 기간에 필리핀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물론 마르코스만의 문제는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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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이래 필리핀에는 각종 이권과 자본을 독점한 가문이 수십 개나 버티고 있었고, 그들은 막대한 돈과 영향력으로 국회의 의석을 사들이다시피 하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강화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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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정치체제는 이익집단이나 계급적·직업적으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에 의해 조직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상호부조 관계를 가진 연결망에 의해 이뤄진다”라고 한 미국 정치학자 칼 H. 란데의 말처럼 말이야. 마르코스는 자그마치 7만명을 투옥시키는 등 자신의 반대 세력을 강경하게 탄압한 반면, 자신과 친한 가문들에게는 무제한의 특혜를 주면서 필리핀판 ‘우리가 남이가’ 시대를 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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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 지역 사람들은 고위 공직과 군 요직을 불하(?)받았고 “필리핀 최고의 유지 집안 자손인 에두아르도 코주안코 2세는 대통령령으로 코코넛 산업을 독점했으며, 마르코스와 함께 필리핀 대학 법대를 다닌 로베르토 베네딕토에게는 설탕 산업을 주었다(〈빅맥이냐 김치냐〉 중).” 마르코스의 재선 당시 경쟁 후보였던 오스메냐의 발언대로 마르코스는 “깡패와 권총과 금으로부터 나온” 승리를 구가하며 필리핀이 지녀온 모순을 확대 재생산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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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미국에도 굴하지 않았던 필리핀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귀족과 토호에게는 양순했다. 시민들이 잘못된 사회에 눈을 감자, 소수 가문은 주요 관직을 독점하며 그들만의 잔치를 벌였고 필리핀이 지녔던 막대한 자원과 잠재력은 봄눈처럼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동아시아에서 ‘내가 두 번째로 잘나가’를 자임하던 필리핀은 자신들의 역사적 자산을 스스로 만든 블랙홀 속에 빠뜨린 셈이지. 마르코스는 필리핀이라는 배를 몰고 블랙홀을 향해 ‘전속 항진’한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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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필리핀 국민들은 용감하게 일어서서 마르코스 독재를 몰아냈지만 사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던 코라손 아키노 역시 타를라크 지방의 영주 코후안코 가문 출신이었고, 그녀의 치적은 결코 ‘가문의 영광’을 훼손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후로도 필리핀 정치는 혼란을 거듭했고 가문들의 힘은 더욱 굳건해졌으며, 상대방 후보와 경쟁이 아니라 전투를 벌여 죽고 죽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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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마르코스 때가 좋았다’는 식의 어이없는 향수까지 넘쳐난다. 현 대통령 두테르테가 정적들을 마구 살해하던 마르코스의 방식으로 ‘사회 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것도 한 단면이지. 두테르테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스는 필리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로 범죄를 해결하는 나의 통치 철학은 마르코스의 것이다. 그는 그가 생각하는 국가 통치를 위해 정부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편 1972년 필리핀은 깨끗했다(〈시사저널〉 2016년 9월6일 ‘두테르테 통치의 뿌리는 마르코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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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 하지만 구조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 없이 사람만 바꾸는 식이라면 대개 인사(人事)는 망사(亡事)로 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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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도 시작은 괜찮은 사람이었어. 전쟁 영웅이자 유능한 변호사였다. 그러나 그의 탐욕과 부패는 필리핀이 키워온 모순을 극대화했고 그의 치세에서 필리핀은 무릎이 꺾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지도자를 선택하고 그에게 권력을 맡긴다. 무책임한 지도자는 나라를 망치지만, 동시에 고민이 부족한 국민은 지도자를 타락시키고 결국 돌이키기 힘든 소용돌이에 스스로를 몰아넣게 되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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