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학교 중동의 시작
1906년 4월 2일 한국의 Midde East(?) 세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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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나라의 문이 열렸다. 은자의 왕국 조선은 한때 ‘양이’(洋夷)라 부르던 사람들과 수교를 맺고 그들과 거래하고 문물을 배우게 됐다. 당장 아쉬운 것이 통역이었다. 미국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는 청나라 사람이 이중 통역을 할 지경이었으니 영 달갑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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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네이티브’ 미국인 교사 3분을 모시고 근대적 교육 기관이라 할 육영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육영공원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1891년에는 일어학교가 세워졌고 1894년 영어학교, 1895년 법어(法語), 즉 프랑스어 학교, 1896년에는 아어(俄語),즉 러시아어 학교가 세워졌는데 1897년 한어(漢語) 즉 중국어학교도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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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관립 중국어 학교 교사로 있던 오규신, 유광렬, 김원배 3명의 의기투합을 한다. “수업을 마친 뒤 교실 일부를 빌려서 밤에도 배우고 싶은 학생들을 가르칩시다!” 이른바 ‘야학’의 형태였다고나 할까. 세 명은 1906년 4월 2일 중국어와 산술(算術), 즉 수학 두 과목을 가르치는 또 하나의 학교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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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배움’에 대한 한국인의 열정은 대단했고 “야학생의 적극적인 호응과 향학열은 일어,한국역사,영어 등 교과목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중동야학교(中東夜學校)로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중등교육기관으로 승격되었다.” (한말야학운동의 성격, 중앙사론 21, 김형목) 중국의 ‘중’(中)과 우리나라를 뜻하는 동(東)을 합친 게 아닌가 생각해 보지만 개인적인 추정일 뿐 (동방의 중앙이라는 뜻으로 중동이라고 했다는 제보가 있었다) . 어쨌건 이 결과 1909년 5월 10일 사립 중동학교가 새롭게 출발했다. (오늘날 중동고등학교는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눈 걸로 안다.)
아 그 중동(中東)?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맞다. 그 중동이다. 입시 고사장 앞에서 괴상하지만 일사불란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입시 때마다 화제의 동영상을 낳는 그 학교의 시작은 바로 세 명의 중국어 교사가 호롱불 밝히며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던 야학이었다. 즉 중동학교는 배재니 이화니 숭실이니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아닌 ‘토종’ 조선인들이 세운 학교로 출발했다. 첫 중동야학교 교장 선생님의 이름도 무게가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였던 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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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시작은 ‘야간 중국어 학교’인 셈인데 ‘중국’과 ‘야간’의 단어가 결합하니 뭔가 시끄럽고 범생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마구 스치고 지나가지 않는가. 실제로 중동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 이후 지금까지 무척 거친 느낌의 학교로 자리매김돼 왔다. 중동학교라면 일제 경찰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후데이센징(불령선인, 즉 번역하면 말 드럽게 안듣는 조센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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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항쟁 때 서울에서 들고 일어난 14개 학교 가운데 하나였던 중동학교는 만세 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약방의 감초였고 꽤 많이 들어가는 감초였다. 3.1항쟁 때와 달리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 경찰의 강력한 진압을 받았던 6.10 만세 운동 당시 서울 시내에서는 최종적으로 47명이 수감되는데 그 중 시위를 주도한 연희전문생이 33명이었는데 중동학교가 6명이었다. 나머지는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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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소식이 서울에 알려진 뒤 서울 시내 학생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을 때 400여명의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 학교별 인원을 보면 이렇다. “보성전문 3명, 휘문고보 없음, 숙명여고 3명, 배화여고 일명, 협성실업 18명, 경신학교 17명, 배재고보 22명....... ”(동아일보 1930년 1월 21일) 그런데 중동에서는 자그마치 198명이 검거됐다. 거의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정신으로 시위하지 않고서야 다른 학교의 열 배 스무 배가 잡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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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동학교의 정신적 지주가 백농 최규동이라는 사람이다. 수학을 기가 막히게 가르쳤다는 최규동은 1914년 학교를 인수해 교장 겸 수학 선생으로 재직하며 중동학교를 이끌었다. “우리 자제는 우리 손으로 가르친다.”는 원칙 하에 일본인 교사를 최대한 배제했고 우리말과 우리 역사 교육도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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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된 광주학생운동 관련 서울 시위 때 일본 헌병이 서슬 푸르게 칼을 빼들고 있는 상황에서 ‘와일드’ 중동학생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려고 하자 최규동은 이렇게 말렸다고 한다. “녹슨 칼을 들고 무엇을 하려는가. 지금은 칼에 녹을 벗길 때다.” 말리는 스승이나 분노한 학생들이나 다 눈물을 흘렸다는 아름다운 전설인데, 눈물은 눈물대로 흘려 놓고 스승이 미처 안보는 틈을 타서 담 넘어 거리로 나가설랑 198명씩 잡혀간 대단한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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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학교들 사정을 까맣게 모르는 부산 출신이지만 ‘중동 깡패들’의 명성은 서울에 오기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누가 자기 학교 학생 건드리면 단체로 달려가 박살을 내 버렸다는 으스스한 이야기, 중동 배지를 달고 다녀야 안심할 수 있어서 다른 학교 학생들도 중동 배지를 예비로 갖고 다녔다는 썰, 패싸움이라도 나면 갑자기 웬 아저씨들이 “나도 중동이다”를 부르짖으면서 패싸움에 개입한다는 허무맹랑한 사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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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중동은 ‘행동으로’ 그 개김성을 여러 번 보여 주었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으나 1953년 7월 발생한 송도 천마산 대전(大戰)만 소개해 보자면.부산에서 피난학교로 운영되던 중동중학교 학생들이 감천 (오늘날 문화마을 근처)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오는 와중에 부산제일공고 학생들을 만나 ‘무조건 작당폭행하여’ (1953년 7월 16일 동아일보 표현이 그렇다) 곤죽을 만들었는데 화가 난 공고생들도 다음날 아침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중동중학 학생들을 습격, 분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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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1명이 가까스로 몸을 빼서 학교로 도망쳤는데 무려 200여 명의 중동학생들이 곤봉을 들고 뛰쳐나와 제일공고를 포위한다. 그러자 제일공고생들도 악에 받쳐 몽둥이를 들고 나섰고 수백 명이 뒤엉켜 제일공고 근처 천마산에서 곤봉과 주먹질 발길질이 오가는 혈투를 벌이게 된다. 무려 30분간. 쌍방간에 20명 가까운 중상자가 나오는 대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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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난투극’ ‘중동 폭력’ ‘중동 폭행’을 검색하면 이 천마산 대전 같은 건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 나온다. 하여간 거친 학교. 강남에 가서도 그 기질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 보이는 학교. 그 학교의 원형이 1906년 4월 2일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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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 출신자들의 이름들을 조금만 읊어도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걸물전 한 페이지가 완성된다. (뭐 이건 역사 오랜 학교들 다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명단을 보다 보면 덜컥덜컥 ‘중동스러운’ 느낌이 드는 걸린다. 삼성그룹의 창시자 이병철 회장은 뭐 그렇다고 치는데 뭔가 엉뚱하게 기 센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다.
대학 입시 때 유명한 중동고등학교 단체 응원 - 중동고등학교 홈페이지
영도 다리에 옥새 들고 뛰었던 김무성도 중동이고 요즘은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것 같지만 한때의 유명한 반골 김지하도 중동 출신이다. 대한민국 국보 1호를 자칭했던 천상천하 유아독존 양주동도 중동, 문화유산답사기로 세상을 평정한 유홍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원자탄’을 썬 손양원 목사도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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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밥 먹던 공립학교 교사들이 우리가 이 봉급 받고 거기에 합당한 일만 할 게 아니라 밤에라도 학교 문을 열고 사람들을 가르쳐 보자고 작당을 했고 책상 몇 개 놓고 야학을 꾸렸고 야학교를 거쳐 정식 학교가 됐고 그렇게 114년이 흘렀다. 그쯤 되면 한 학교가 아니라 학교의 옛 터라고 해도 역사가 될 시간. 중동학교가 앞으로도 그 폭력성은 탈각하되 개김성은 버리지 말고 우리 역사의 걸물들을 많이 만들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