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7일 고독한 타격 천재의 영면

in #kr4 years ago (edited)

2011년 9월 7일 고독한 타격 천재의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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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재미있는 뉴스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대통령배 전국 야구대회에서 강릉고등학교가 창단 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 그런데 이건 강릉고등학교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원도 전체에서 전국 단위 ‘야구’ 대회에서 우승했던 것은 사상 처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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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로 따져도 근 75년 동안이니 장구하기도 하다. 그만큼 강원도는 ‘야구의 불모지’였다. 강원도는 특별한 케이스라고 치지만 천안북일과 대전고등학교 정도를 제외하면 충청도도 그다지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한국의 고교 야구 판세는 견고한 삼각형. 즉 서울 영남 호남 구도의 역사에 간혹 ‘다크호스’들이 명함을 내밀어 보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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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이전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축구 그 다음으로는 고교 야구였다. 대통령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등 4대 전국 대회 경기는 지상파 생중계 대상이었고 구름같은 관중이 몰려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의 일구 일타에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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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교야구가 이렇게 인기를 끈 시기를 대충 1960년대 말부터로 잡고 프로야구의 출범을 그 종말로 잡는다면 이 시종(始終) 어간을 화려하게 장식한 건 대구 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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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등학교는 1971년 정통파 투수 남우식을 선봉으로 황규봉, 이선희, 배대웅 등 쟁쟁한 멤버로 무려 5관왕 (위 4개 대회 플러스 부산 지역 주최 전국 대회급인 화랑대기)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웠고 프로야구 출범 직전 아이돌 스타(?)였던 선린상고의 박노준과 김건우를 물먹인 것도 성준, 유중일의 경북고등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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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구에는 이 경북고등학교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우리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괄목할만한 성적을 내던 야구 명문이 또 있었다. 대구상고였다. 1928년 창단돼 일제 강점기에도 전국 수준의 야구 실력을 자랑했던 이 학교는 해방된 뒤 1950년 6월 18일 청룡기를 거머쥐면서 대한민국 최강자임을 선언한다. 그런데 1주일 뒤 전쟁이 터졌고 우승팀 대구상고 학생들 다수는 고향 대구를 지키기 위한 학도병으로 투입된다. 주장 박상호, 3루수 이문조, 우익수 석나홍은 이 전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박동희의 야구탐사] ‘돌아오지 않은 학도 야구소년들’.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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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열린 고교야구의 전성기 때 대구상고는 경북고등학교의 전관왕 신화에는 다소 못미쳤으되 만만치 않은 지역 라이벌로서의 성적을 과시했다. 간간이 전국 대회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며 기염을 토하던 대구상고의 전성기는 1973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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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활약한 선수들의 이름을 보면 10년 뒤의 프로야구가 보인다. 김용희, 배경환 (경남고) 정구선 (대전고) 김일권(군산상고) 하기룡 이광은 (배재고) 임호균 (인천고) 등등. 그리고 여기에 대구상고의 걸출한 타자 하나가 빛난다 장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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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는 대구상고의 독무대였다. 경남고등학교에게 청룡기만 내줬을 뿐, 대통령기와 봉황대기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9월 13일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배명고등학교와 만난다. 3대0으로 앞서나가던 대구상고는 8회말 배명고등학교의 끈질긴 추격에 동점을 허용한다. 배명의 홈구장(?)이라 할 서울운동장은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거의 전교생이 몰려온 배명고등학교 학생들은 전원 기립하여 교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운동장에 따라나선 꼬마들도 이런 것이 야구인가 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박수를 보낼 정도”(1973년 9월 14일 동아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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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역전을 노린 배명고등학교는 9회말 1사 만루 찬스를 맞지만 무위로 넘겼고 게임은 연장으로 들어갔다. 10회초. 한 2학년생이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가 상대팀 에러로 2루에 진출했다. 이때 다음 타자가 적시타를 쳤는데 좀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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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수비를 하고 있던 외야수가 공을 걷어내 홈으로 뿌렸는데 2루 주자도 죽을둥살둥 홈으로 달려들었다. 수만 관중이 숨을 죽인 순간 심판의 양팔이 횡으로 허공을 갈랐다. 세이프였다. 대구상고 덕아웃은 떠나갈 듯 했고 관중석도 환호로 뒤집혔지만 2루 주자는 일어나지 못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홈플레이트를 짚은 후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기절할 만큼 달렸던 2루 주자의 이름은 장효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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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좌타자로 성장해 나간다. 특히 그의 선구안은 특출했다. “장효조가 안치면 볼이다.”는 것은 객쩍은 농담이 아니라 팩트에 가까웠다. 그 예리한 눈으로 공을 지켜보다가 방망이를 휘두르면 타구는 부챗살처럼 좌중우로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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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일본의 고시엔에서 노히트노런 9회, 퍼펙트 게임 2회를 달성한 ‘괴물투수’ 에가와 스그루의 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두들겨 일본인들을 망연자실케하기도 했고 한양대 시절 백호기 대회에서는 타율 7할 1푼 4리라는, 만화 주인공같은 타율을 기록했다. 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팀이 준우승을 차지할 때는 준우승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MVP를 받을 만큼 맹타를 휘둘렀다. 프로야구 들어와서도 ‘타격의 달인’의 행로는 멈추지 않았고 몇 번인지도 모를 타격 부문 트로피를 챙겼다. 통산 타율 3할 3푼 1리는 (3천타수 이상 출장 중)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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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타고난 ‘달인’이나 ‘천재’라기보다는 야구를 위한, 야구에 의한, 야구 인생을 살았던 노력파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다. “(호텔에서 묵는 중) 하루는 선배가 한밤중에 배트를 들고 산으로 가시더라고요. 그곳이 공동묘지 구역이었는데 거기서 밤새 타격 훈련을 하시는 거예요.” (김성래의 증언, 엠스플뉴스, 김원익의 휴먼볼,‘우리는 타격천재 장효조를 잊지 않았다.’ 중) “중, 고, 대학교 시절 항상 혼자 남아서 개인연습을 많이 하셨다. 나도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다 자극을 받고 타격연습을 옆에서 한 적이 많다. 항상 자정이 넘어 귀가하곤 했다.”(이만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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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다른 분야에는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속은 여리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일관된 평가지만 밖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고 프로야구 선수다운 쇼맨쉽도 적었다. 팬서비스에도 서툴렀다. 개인적으로 중학교 2학년 때 야구 보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효조에게 노트를 내밀었다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바람에 상처를 입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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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의 개인적 단점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일체 하지 않고 야구에만 전념했던 ‘프로야구’ 선수아닌 ‘야구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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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망이를 놓은 장효조는 칼을 놓아버린 검객과 같았다. 자신의 칼에만 몰두했던 무사는 남의 칼을 보아 주기도 어려운 법, 지도자 생활도 순탄하지 못했고 오랫 동안 야인으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2005년 오랜만에 삼성 구단의 스카우트로 복귀했을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부인으로서는 처음 보는 남편의 황소 울음이었다. 그에게 야구는 무엇이었을까. 모든 걸 다 바쳐도 아깝지 않고 그 뒤에 배신을 모질게 당해도 진저리 하나 나지 않고, 어떻게든 그 곁으로 돌아가고픈 ‘나쁜 여자’ 또는 ‘나쁜 남자’같은 존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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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일 무서워한 투수는 최동원이었고 최동원이 제일 두려워한 타자가 장효조였다. 이 둘은 공통점이 있었다. “자기만 안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식의 비난을 받았다는 점. 그러나 그 고고함(?) 뒤에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에 대한 배려가 숨어 있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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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참이고, 팀의 간판인 만큼 내가 연봉 협상을 잘해야 동료와 후배가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구단과 대립각을 세웠다. 선수의 복지와 권익 문제를 다룰 때도 선수 입장을 구단에 전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장효조가 동료를 이용해 자기 연봉을 높이려 한다’라는 근거 없는 비난이었다.” (시사저널 2011.9.20.) 최동원 역시 그랬다. 후배들을 위해 구단과 각을 세우다 보면 “자기만 아는 최동원”이라는 말이 흘렀고 기자들은 그걸 열심히 받아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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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투타의 전설이라 할 두 선수가 자신들을 수호신으로 섬겨야 할 구단들로부터 버림받다시피 한 것도 같다. 장효조는 롯데 유니폼을 입었고 최동원이 삼성 유니폼을 입고 그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것도 묘하다. 둘 다 부산 출신이었던 (장효조는 대구로 이사가서 대구에서 컸지만) 한국 야구 투타의 전설은 둘 다 암으로 쓰러졌다. 장효조는 간암, 최동원은 대장암. 둘은 1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떴다. 장효조는 2011년 9월 7일. 최동원은 2011년 9월 14일 오늘은 장효조의 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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