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9월 18일 고지(高地)를 좋아했던 시인

in #kr4 years ago

1982년 9월 18일 고지(高地)를 좋아했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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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이야기로 누군가 암송할 수 있는 시를 대 보라고 하면 머리를 긁는다. 윤동주의 <서시> 정도나 경우 기억할까 나머지는 ‘대충’ 얼개만 읊을 뿐 시인들이 갈고 닦은 빛나는 말 조각들을 좀체 꿰지 못한다. 그런데 시조는 좀 예외다. 지금 앉아서 되는 대로 써 보라고 해고 스무 수는 넘게 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형(正形)이 있으니 노래하듯 읊을 수 있고 그를 머리 속에 담기도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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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나라가 조선이 망한 뒤 다른 구시대의 유물들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에 속하던 시조가 부활한 것은 일종의 ‘반동’이었다. 계급 문학론을 깃발로 내건 KAPF와 맞서면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하듯 시조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것이다. 시발은 최남선이었고 판은 가람 이병기가 깔고 깨끗이 쓸었다. 그 판에서 화려하게 자신의 문재를 뽑낸 이 가운데에는 노산 이은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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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그는 시조가 문학이 아니라고 경멸한 적이 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런데 시조 논의를 통해 그 가치를 이해하게 되면서 “시조도 문학이 될 수 있겠다”고 사고의 전환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명 시조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 가곡의 톱클래스 명곡에 들어가는 <가고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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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은 양주동과 단짝이었다. 자칭 대한민국 국보 1호라고 할만큼 그 자존심이 성층권에서 놀았던 양주동이나 글로는 누구한테도 안진다고 생각한 이은상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일본 유학도 때도 한 하숙집에 살았던 사이였고 한문과 고전에 능통했다. 서로가 시조를 지으면 그걸로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서로의 재능을 인정했던 사이라고나 할까. 이런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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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유학 시절 스스로 천재라는 믿음이 굳건했던 양주동은 별 것도 아닌 듯한 이은상이 “나도 너만큼 천재야.”하고 뻗대도 무시했다. 감히 네가 무슨 천재냐...... 그런데 어느 날 이은상이 구름을 소재로 시 한수를 지었다고 내밀었다. “한 번 들어 봐. "구름 저 하늘 위에 떠있는/구름을 무엇에다 비길까-/하늘 누에라 할까,/내가 어렸을 적 타고 놀던/강아지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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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듣던 양주동이 벌컥 했다. ”어이 그거 두보의 시 ‘하늘에 뜬 구름이 흰옷과 같았는데 잠시 뒤에 변하여 푸른 개(蒼狗)가 되었구나’(天上浮雲如白衣 斯須改變成蒼狗)에서 따온 거 아냐. 넌 시 쓰지 마. 뭘 베끼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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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은상은 고집을 부렸다. 더 들어 봐 ”오요요 부르고 싶은 마음-/그 마음 귀여울러라" 시 속에서 개를 부르는 ‘오요요’ 소리가 독특했던지 양주동은 그예 이은상의 문재를 인정한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 “내 너를 시인으로 인가하노라.” 이은상은 친구의 칭찬이 기분 좋으면서도 기분 나빴으리라. 양주동은 후일 시조로 당시의 심정을 묘사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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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 그대와 나와 뉘야 더욱 「재주」 던고
한 걸음 앞섰다고 노상 위라 뽐내다가
오요요 ‘구름’부른 날 내 못 밎다 (못 미친다?하니라.”
국보 1호 양주동이 이렇게 겸양 부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신문사에서 일하던 이은상은 백두산 기행을 갔다가 평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양주동을 찾아갔고 양주동은 이은상과 해후한 김에 ‘이은상 시조 특강’을 연다. 그 강의를 유심히 듣던 학생 하나가 이은상의 시조 하나를 적당히 노랫말로 어루만져서 노래를 만드니 이 노래가 <가고파>였고 스무 살 학생의 이름은 김동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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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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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조를 쉽게 외웠던 그 이유로, 이은상의 시조는 홍난파, 박태준, 김동진 등 당대의 곡가들이 짓는 멜로디의 집이 된다.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고향생각, 홍난파 곡, “장하던 금전벽우 천재되고 남은 터에.....”(장안사, 홍난파 곡)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친구 생각, 박태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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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인적으로 그의 시조 가운데 가장 절창이라 보는 건 이 시조다. 일부 닭살스러운 ‘국뽕’에 작위적인 ㄴ낌이 매우 강하나 ‘겨레; 같은 단어를 좀 바꿔서라도 가끔은 음미하고 싶은 시조다. 이은상 본인이 살았던, 그리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울며 불며 악으로 깡으로 각자의 ’무언가‘를 향해 치달았던 시대를 압축한 것 같은 느낌이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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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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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반전은 이은상 본인은 그다지 ’고난의 운명‘을 겪지 않았고 ’역사의 능선‘을 타기보다는 가마 타고 산에 오른 쪽이었고 ’밤에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했던‘ 세월도 드물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지만 해방 이후에는 완연히 ’고지‘(高地) 즉 저 높은 곳의 사람들에게 항상 손을 비비고 그를 통해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던 쪽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분단된 나라의 남쪽에서 힘이 어디에 있고, 그 힘이 무슨 일을 벌일 수 있는지를 절감할 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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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풀려난 이은상이 감시에서 벗어나고자 전남 광양에까지 내려와 머문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사상범 예비 검속으로 잡혀갔다가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는다. 이 유치장에서 만난 이들과 인연이 돼 호남신문사 사장을 역임하게 됐는데 이때 그 직함을 활용해서 국군으로 재편되는 국방경비대 장교들의 신원 보증을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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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은상이 보증을 선 인물이 여순 사건 이후 14연대 반란군의 지휘자가 되는 김지회였다. 무슨 곤욕을 치렀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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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그는 철저하게 남한의 저 높은 곳의 권력의 해바라기로 살았다. 그의 고향은 마산이지만 3.15 부정선거 이후 마산 사람들의 봉기를 한 마디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다! 불합리와 불법이 빚어낸 불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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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 김주열의 눈에 최루탄을 박고 시신마저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푸른 물”에 처박아 버렸던 정권의 수장 이승만에게 “성웅 이순신같은 분이라야 나라를 구할 것인데 그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라고 아부했던 사람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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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람이 4.19 이후 정권이 넘어간 뒤에는 이렇게 바뀐다, ”해마다 4윌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아... 고난의 길을 피해 보신(保身)의 능선을 타는 작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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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 낀 작달막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에는 그 장군이 만든 정당 공화당 창당 선언문을 쓰고 박정희의 기호에 맞게 ’성웅 이순신‘을 하느님과 동기동창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한다. “보라 우리 눈앞에 나타나신 그의 모습.....”하는 충무공의 노래는 <가고파>의 김동진과의 합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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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콤비는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도 맺어져 박정희 추모가를 함께 만든다. 박정희 추모가의 첫 구절은 이것이었다.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 가을 어인 광풍 낙엽지듯 가시어도 가지마다 황금열매 주렁주렁 열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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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잘 모르지만 글 하나는 참 잘 쓴다 싶다.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향해야 할 권력‘이 그에게 있었고 그는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에 충실했다. ’고지‘의 사람들에 대한 일편단심(?)은 전두한 때까지 이어졌다.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는 국정자문회의 위원까지 됐고 1982년 9월 18일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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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대문화백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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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양주동도 한 수 접는 재주가 갔을까 싶기도 하고 어떻게 이런 하늘이 낸 재주를 두더지 이하로 써먹었을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해방 이후 그는 그의 재주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만 썼지 낮은 곳을 돌아볼 생각도, 저 높은 곳에는 누가 있고 그들이 왜 거기에 있는지를 고민도 하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훈풍을 즐기고 높은 곳의 바람잡이 노릇을 하며 개평이라도 얻었을 뿐.
. 그의 생애는 그렇게 비루했지만 그래도 그가 남긴 노래와 시조들은 어쨌든 우리의 일부로 남아 있게 되겠지. 그 모두를 빼면 우리 모두가 앙상해지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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