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3월 31일 제시 오웬스 가다

in #kr6 years ago

1980년 3월 31일 기억하고 싶은 사람 제시 오웬스

신흥 강대국 미국의 20세기 초입은 매우 어수선했다. 흑인 노예가 해방된지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인종차별은 오히려 더욱 극심해졌다. 선거권은 주어졌지만 선거하러 가다가 어느 몽둥이에 맞고 고꾸라져 목이 매달릴 지 몰랐고 투표하고 왔더니 집이 잿더미가 되고 가족이 불타 죽은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목화밭 노동에서는 ‘해방’됐으나 딱히 먹고 살 것이 없었던 흑인들의 앞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켄터키 옛 집’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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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경부터 시작된 남부 흑인들의 미국 북서부로의 대이주를 미국 역사에서는 “Great Migration”, 흑인 대이동이라고 부른다. “못살겠다 떠나보자.”를 부르짖는 듯 했던 흑인들의 대이동을 촉발한 것은 또 하나의 인종차별이라 할 이민법이었다. 1924년의 이민법은 “1890년 인구 조사 때 미국에 살던 각국 출신의 2% 이하로 제한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특히 아시아 출신의 경우는 아예 이민을 금지해 버렸다. 이민들이 줄어드니 막 써먹을 노동력이 부족해졌고 이 틈을 흑인들이 메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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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의 흑인들이 미국 북부와 서부로 이동했다. 그 중 노예의 후손으로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앨라배마 (포레스트 검프의 고향)를 떠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사한 가족이 있었다. 미국판 흥부 가족, 열 명이 넘는 남매들이 우글거리는 집안. 유난히 허약해 콜록거리기 일쑤였던 막내 (끝에서 두 번째라고도 한다)는 전학 간 학교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제임스 클리블랜드 오웬스 대신 약자로 J.C 오웬스라고 얘기했는데 그냥 'Jesse'로 불리우게 된다. 제시 오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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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지가 약했고 체격도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되었지만 오웬스는 육상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의 기록을 재던 교사가 초시계가 고장났다고 착각할 정도로. 이 천재를 간파한 것은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이자 고등학교 체육 교사 찰스 라일리였다. 오웬스 역시 라일리의 지도를 스폰지처럼 빨아들였다. 라일리 본인이 “내 지시를 가장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연습하는 제자였다.”고 회고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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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리는 오웬스에게 흥미로운 가르침을 준다. “트랙에 불이 났다고 상상하고 뛰라고. 발이 땅에 붙어 있으면 붙어 있을수록 너는 불타 버리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가볍게! 더 위로!” 오웬스는 후일 이렇게 얘기한다. “백인이 흑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증명해 준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운동선수 뿐 아니라 남자가 되도록 훈련 시켰다.” 그런데 오웬스는 당시 미국의 흑인 치고는 백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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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립 대학에 입학한 뒤 명코치 래리 스나이더를 만난 것도 그랬다. 스나이더 역시 인종차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엄격한 훈련 아래 일취월장한 오웬스는 세계 신기록 여러 개를 갈아치우며 미국을 대표하는 육상 선수로 우뚝 섰다. 제시 오웬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는 따를 자가 없는 단거리 세계신기록 보유자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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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나찌 치하의 베를린 올림픽이었기에 시작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유태인 선수에 대한 박해 소문이 퍼지면서 참가 거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IOC는 '엄밀한‘ 조사 후에 유태인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올림픽 계속을 선언했지만 IOC에서 추방당할 만큼 강력히 반대한 인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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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올림픽은 열렸고 우려대로 올림픽은 나찌의 정치 선전장으로 마음껏 활용됐다. 제시 오웬스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흑인 선수가 나찌의 올림픽을 거부함으로써 인종 차별에 제대로 한 방 먹여 보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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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편한 속을 달래고 있는데 한 독일인이 선수촌으로 그를 찾아왔다. 아돌프 다슬러. 독일의 총통과 퍼스트 네임이 같았던 다슬러는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여자 8백미터 금메달리스트 리나 라드케가 자신의 신발을 신고 우승했고 독일 선수들 중 많은 이들이 자기가 디자인한 신발을 신고 있노라며 운을 뗀 그는 오웬스에게 두 줄이 그어진 운동화를 내밀었다. “이걸 신고 뛰어 주시겠소. 내가 이걸 당신 주려고 바이에른에서 베를린까지 차를 몰고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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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삿속이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독일 사람들이라고 다 나찌는 아니구나.... 오웬스는 쾌히 승낙했다. 그 신발이 바로 ‘아디다스’ (이 이름은 2차대전 이후에 만들어지지만)의 원조였다. (이때는 세 줄이 아니라 두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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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제시 오웬스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10초 3의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4개 종목의 금메달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거기에는 큰 고비가 있었다. 멀리뛰기 종목에서 두 번이나 실격한 것이다. 긴장한 탓도 있겠고 당시 유럽 챔피언이던 독일의 육상선수 루츠 롱의 존재에 대한 부담감도 작용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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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금발의 당당한 체구. 히틀러가 얘기한 ‘아리안 인종’의 표본 같은 롱이 오웬스에게 다가왔다. 오웬스는 순간 움찔했으리라. 고향에서 이런 백인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잘 아는 터에 또 무슨 서툰 영어로 “검둥아 목화나 따러 가라.”고 할 지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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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롱은 역시 서툰 영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뜻밖이었다. “발구름판 몇 인치 남겨놓고 뛰어도 될 거예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라이벌, 그것도 완벽한 ‘백인’, 그것도 인종주의를 대놓고 표방하는 나라의 대표선수에게서 나온 따뜻한 충고. 오웬스는 용기 백배 3차 시도를 뛰었고, 롱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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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한 롱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웬스에게 축하를 건넸고 정답게 사진도 찍었다. 이 때문에 롱은 히틀러에게 미움을 샀다고 한다. 오웬스 자신도 라커룸에서 롱에게 이래도 되냐고 걱정했고 자서전에서 “히틀러의 면전에서 나와 같은 흑인과 친구가 된 롱의 용기는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고 그날의 감동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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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터진 후 롱은 독일군으로 징집돼 시칠리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히틀러가 그를 미워해 최전방으로 보냈다는 얘기도 있지만 시칠리아 전선이 최전방 같지는 않다. 독일의 ‘영웅’ 프로복서 막스 슈멜링은 공수부대로 보내지기도 했으니. 그러나 1943년 롱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웬스는 자기 일처럼 슬퍼했고 후일 롱의 유가족들을 직접 찾아가 위로했으며 롱의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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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복(?)이 많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일 뿐, 미국의 인종차별은 나찌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히틀러가 유색인종과의 악수를 거부하면서 오웬스도 외면해 버렸다는 것은 미국 언론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였다. 되레 올림픽 4관왕 오웬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남부 표를 의식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었다. 오히려 오웬스는 “히틀러는 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고 밝히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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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올림픽 4관왕은 미국 육상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했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올림픽 15개월 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순수한’ 아마튜어 자격을 버린다. “금메달을 먹을 수는 없지 않는가.” 오웬스의 침울한 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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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은 참담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밤무대에서 악기를 불고 탭댄스를 춘 건 양반, 개와 말, 오토바이와 경주쇼를 벌여야 했다. 동아일보 1937년 7월 13일자 내용 “전번 말과 경주하여 새것 좋아하는 양키들의 갈채를 받아 영국 육상계의 기숙(耆宿:원로) 에이브럼스로 하여금 ‘인류의 타락이다’라고 개탄케 하였는데 이번에는 개와 경주를 하였다. 이 개의 발걸음은 사람보다 배나 빠르다는 그레이하운드로...... ” ‘인류의 타락’을 오웬스가 범한 것인지 올림픽 4관왕에게 그런 ‘이벤트’를 기획한 이들이 저지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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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오웬스는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처럼 철저한 ‘엉클 톰’으로 행동하며 백인에게 일절 고개 쳐들지 않는 캐릭터는 아니었고 자신이 당한 차별을 술회하며 분노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무하마드 알리처럼 적극적으로 나설 만한 깜냥도 없었다. 심지어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당시 미국 흑인 선수들이 저항 행동을 기획할 때 인종차별주의자로 이름난 브런디지 IOC 위원장의 사주를 받아 흑인 선수들을 만류하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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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올림픽에서 누려야 할 영광을 정치적인 이유로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올림픽으로 가는 길은 어느 도시나 국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최선의 길로 가는 것이다.”고 호소했으니까. 그 영광 이후가 참혹했을망정 영광의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에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저 누려 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때 자신을 도왔던 백인들, 극히 드물지만 분명히 나눴던 인류로서의 동질감, 그를 바탕으로 한 우정의 기억들이 그의 모서리를 깎았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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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세계 육상 선수권이 베를린에서 열렸다. 그때 멀리뛰기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낸 흑인과 백인이 있었다. 바로 제시 오웬스의 손녀와 오웬스의 독일인 친구 루츠 롱의 아들이었다. 그 둘은 함께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답했다. 언젠가 자료화면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다시금 오웬스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1980년 3월 31일 제시 오웬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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