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3월 14일 진주민란의 경제학

in #kr8 years ago

1862년 3월 14일 진주민란의 경제학
.
1862년 음력 2월 14일, 양력으로 3월 14일 중요한 사건이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납니다. 몰락한 양반 유계춘 등의 주도 하에 진주 일원의 초군(樵軍), 즉 나무꾼패들이 집결하여 시장을 습격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른바 진주민란의 발발이었죠. 초군들이 행동을 개시하자 바짝 마른 낙엽에 불똥이 떨어지듯 백성들도 함께 들고 일어서면서 유서깊은 진주 일대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사태의 핵심은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에 있었습니다. 백낙신은 세무장부 조작과 세금 전용을 기본으로 하고 무기를 사들일 예산으로 쌀을 매점해 춘궁기 농민들에게 강제 대출한 뒤 가을에 고리를 얹어 거둬 들이고 황무지를 일구거나 광산을 채굴한 이에게 외려 세금을 추징하는 등 탐관오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여기에 그때까지 지방관들이 해먹은 몫을 한꺼번에 돈으로 다 바치라는 요구까지 나오면서 백성들은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
진주민란.jpg
영화 <군도>가 바로 이 즈음을 배경으로 합니다.
.
늘어난 인구에 비해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토지 생산성은 떨어지고 있었고 제대로 된 재정 수입이 줄어들면서 농민들에게 싼 값에 곡식을 빌려 주고 가을에 되돌려받는, 일종의 사회 보장 제도라 할 환곡(還穀)은 엉뚱하게도 부족한 재정을 메우는 수단이 돼 버립니다. 요즘으로 치면 국민연금을 인상하여 (나중에 돌려준다고 생색을 내면서) 부족한 재정을 메우는 형국이었지요.
.
진주 사람들은 무턱대고 봉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을 사또에게 빌었고 감영에 가서 엎드렸고 봉기 3년 전 1859년에는 집단적으로 서울에 올라가 비변사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던 겁니다. 봉기가 일어난 뒤에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 보자는 논의와 세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하기도 했지만 일단 물꼬가 트인 사람들의 기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법이죠. 백성들은 마침내 진주 읍내를 점거합니다. 경상우병사 백낙신은 차마 건드리지 못했지만 못되게 놀던 아전들은 맞아 죽거나 불 속으로 던져집니다.
.
철종 어진.jpg
이때 왕이었던 강화도령 철종의 어진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옮겨졌던 어진들이 불에 타면서 반쪽만 남았죠
.

탐관오리의 탐학이 난리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되 백성들의 가슴에서는 양반 상놈 구조와는 또 다른 분노가 장작을 쌓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불평등이었지요. 진주는 원래 물산이 풍부한 고장입니다. ‘경상도 속 전라도’라 불릴 만큼 음식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고 경제력이 풍부한 곳에서 으레 번창하는 ‘기생’도 유명해서 조선 팔도에서 평양 기생과 쌍벽을 이루는 진주 기생의 터전이었죠. 하지만 그 부유한 고장 안에서 계층의 분화와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
1846년(헌종 12) 진주 나동리의 경우 약 6%의 토지소유자가 44%의 농지를 소유했으며, 63%에 달하는 빈농층은 18%의 농지를 소유하는데 그쳤습니다. 또 경영상의 분화도 극심해 1845년 가서리의 경우 1결 이상 경작하는 부농은 3.6%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차지한 경작 면적은 총 면적의 29.6%에 달했고 반면 72.5%의 빈농이 부치고 살던 땅의 면적은 고작 27.3%에 그쳤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진주민란)
.
이쯤 되면 농사를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배부른 금수저는 따로 있고 배 곯는 흙수저 역시 정해져 있게 마련입니다. 탐관오리만이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함께 겪는 폭정도 견디기 어려운 터에 폭정 속에 누군가는 배를 불리고 자신의 어깨만 무거워지는 상황은 사람들을 더 격동시켰습니다. 농민들은 진주 외곽을 휩쓸며 100여채의 집을 습격해서 부숴 버리거나 재물을 빼앗습니다. 사하촌(寺下村) 거느리고 그 땅에서 나는 수확 위에서 유유자적 염불 외우던 절들까지도 가슴을 졸여야 했지요.
.
이 진주민란은 1862년 조선을 전국적으로 뒤흔든 임술민란의 봉화가 됩니다. 그때까지 악으로 깡으로 참고 있던 조선 백성들은 더 이상 못살겠다면서 각지에서 도끼 들고 죽창 꼬나쥐고 일어섭니다. 북으로 함경도 단천에서 남으로 제주도까지 곳곳에서 터져 나온 분노의 원천은 물론 정부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학정에 큰 부분을 두고 있으나 조선 후기 ‘놀부와 흥부’같은 계층 분화가 이뤄진 사회적 불평등도 크게 작용합니다. 진주민란은 그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지요.
.
2015년 10월 동국대학교 김낙년 교수는 ‘한국의 부의 불평등 2000~2013: 상속세 자료에 의한 접근’ 논문에서 2010~2013년 기준으로 “자산 상위 1%가 차지하는 자산이 전체의 25.9%, 자산 상위 10%가 가진 자산은 전체의 66.0%”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부의 집중도는 2000~2007년 기간에 비해 각각 1.7%포인트, 2.8%포인트 높아졌습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의 집중이 촉진되고 있다는 얘기죠. 그럼 하위 50%가 가진 자산은 얼마일까요? 전체의 1.7%였습니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정도가 진주민란 당시의 진주보다도 훨씬 심각하며 그 격차 또한 비길 바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
부정부패를 막고 관리의 횡포를 막는 것은 당연히 정부가 할 일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나라의 부와 재화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그 특권이 세습되어 다수에게 상실감을 안기는 일 또한 정부의 몫일 것입니다. “각자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맡은 바가 다르고 할 수 있는 일이 차이난다면 ‘열심히’의 내용과 방향은 천차만별이 되는 세상이라면 더욱 그렇고 말입니다.
.
진주민란 때 그 집이 불태워지고 가재도구를 빼앗긴 지주들도 ‘열심히’ 정해진 대로의 소작료를 거뒀을 것입니다. 경상우병사 백낙신은 어쩌면 그때까지 전임 병사들과 목사들이 해먹은 돈을 일단 배우고 ‘제로세팅’하기 위해 ‘열심히’ 무리수를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진주민란은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Sort:  

데이터로 보니 이해가 빠르네요.

네 저도 그랬습니다.....

사회적 박탈감은 사회 불만으로 초래되고, 말씀하신대로 극단적으로 인란 민란이라던지 분쟁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는 (중동 등)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니 우리가 역사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이 부분이 단숨에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길 바랍니다 .

동감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뭉치면 백성이여 흩어지면 도적이라..... 군도의 대사죠

예나 지금이나 부의 집중이 문제군요....

그것도 요즘이 더욱 극심하다 하니... ㅠㅠ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2
JST 0.086
BTC 60178.54
ETH 1576.95
USDT 1.00
SBD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