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에 잠든 파란눈의 이방인

in #kr6 years ago

서해안의 푸른 보석’을 아시나요? 바로 태안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을 이르는 말입니다. 저는 이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 수목원의 나무 아래 잠들어 있지요. 저는 이곳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여생을 보냈으며, 땅으로 돌아가 나무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내 고향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웨스트피스턴이라는 곳입니다. 넓은 미국 땅에서 동북쪽, 뉴욕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곳이지요. 그곳에서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라고 불렸던 제가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이곳 태안에서 잠들기까지는 참으로 긴 여정이었습니다.
고향인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고,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았고, 한자도 배웠지요. 그러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일본어를 배워 오키나와 섬의 미군사령부 통역장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한민국이 독립을 맞이하면서 연합군 중위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당시 25세에 처음 한국과의 인연을 맺은 이후 몇 차례 한국과 미국을 오가다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해 자리를 잡으면서 한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한국에서 살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한국의 자연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발견해 잘 간직해 후손에 전달하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잘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그 여름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아직 칼 밀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때, 저는 한국의 해변을 걷는 것을 무척이나 즐겼지요. 당시 다니던 직장의 동료들과 여름휴가를 맞아 태안의 만리포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 만리포는 이전에도 수차례 찾았던 터라 이미 마을 주민들과 사정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해변 산책을 나섰을 때였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노인이 저를 붙잡아 세우고는 말을 건네 왔습니다. 사정인즉슨, 딸이 결혼을 하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땅을 처분하고 싶으니 저에게 좀 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평소 이곳 만리포해수욕장 근처에 별장을 갖고 싶었던 터라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촌부의 갑작스런 제안은 그렇게 제 운명이 되었습니다.
외국인인 이방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은 금방 지역에 퍼졌고,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땅도 사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렇게 구입한 땅에 낡은 기와를 실어다 작은 집을 짓고 나머지 공간에는 나무를 심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평소 나무가 많은 아담한 농원 같은 별장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Screenshot_20180121-090312.jpg

그러나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있었습니다. 구입한 땅이 모래가 많이 섞여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갈밭을 고르고 땅을 파면 모래가 나오고 또 파면 소금기를 머금은 황토가 나오는 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땅에도 분명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야산에서 이 척박한 땅을 헤치고 나무들이 자라는 것처럼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땅은 15만평 정도로 늘어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본격적인 수목원을 조성하고자 마음을 먹고 전문가들과 조사를 하던 중 이곳이 특별한 기후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토양은 척박해도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 겨울에도 비교적 기온이 높게 유지돼 다양한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공존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 같은 행운이 또 있을까요!
가능성을 확인한 저는 본격적으로 수목원 조성에 나섰습니다. 특히 한국의 나무들에 대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식물도감》이라는 책을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지요. 어려운 전문용어가 이해하기 힘든 점도 있었지만 늦게 시작한 공부이니만큼 더 많이 노력해야 했고, 그보다 진심으로 나무 공부가 즐거웠습니다.
한국 땅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진짜 한국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제 남은 삶은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결심이 확고하게 선 것도 그때쯤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식으로 이름도 지었습니다. 한국은행에 오래 다녔는데, 그대 총재였던 분이 민병도 선생이었습니다. 제 미국 이름인 ‘밀러(Miller)’와 발음이 비슷해 그 이름을 따르기로 했지요. 그리고 마지막 자는 ‘칼(Carl)’과 비슷한 ‘갈’을 붙였습니다. 그때부터 제 이름은 민병갈이 되었고 정식으로 귀화도 신청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미국에서 산 시간보다 한국에서 보낸 세월이 더 길어진 때였습니다. 제2의 고향이 된 셈이었죠. 당시 미국에 계시던 어머니는 제가 한국 사람이 되는 것에 무척이나 반대가 심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전한 한국인이 되겠다는 것은 말리고 싶으셨나봅니다. 긴 설득 끝에 어머니께 제가 살고 있는 한국에, 제가 일군 태안의 수목원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함께 보러 갈 것을 청해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수목원을 둘러보신 어머니는 무척이나 놀라셨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어머니께 함께 살자고 말씀드렸고, 결국 어머니도 찬성하셨습니다.
수목원에서 함께 지내면서 어머니도 한국의 나무와 꽃들을 사랑하게 되셨지요. 특히 집 앞의 목련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살아 있는 수목원을 아들이 만들었다는 것에 항상 대견스럽다고 말씀해주셨죠.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저는 매일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목련나무를 찾아가 함께했던 시간을 추억하곤 했습니다. 나무는 가끔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하는 목격자가 되어주기도 하죠.
저 역시도 2002년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이치이지요. 저는 눈을 감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제 묘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자리에 한그루의 나무라도 더 심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숨을 거둔지 10년 후 나는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셨고 나도 무척이나 아꼈던 목련나무 아래 한 줌의 흙이 되었습니다. 죽어서도 수목원에 계속 머물러 나무들과 함께할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Screenshot_20180121-0903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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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을 이야기하다(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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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야기 시리즈]
        바닷바람이 들려주는 찬란한 이야기 - 태안을 이야기하다

| 지역 : 소원면
| 소재 : 천리포 수목원,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 시대 : 근·현대
| 관련 관광자원 : 천리포 수목원
| 내용 :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선정되기도 한 천리포수목원을 설립한 민병갈 선생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미국인인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와 태안 땅에 수목원을 일구고 평생을 바쳐 가꿔온 사연을 이야기한다.
| 작가 : 매스씨앤지
‘서해안의 푸른 보석’을 아시나요? 바로 태안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을 이르는 말입니다. 저는 이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 수목원의 나무 아래 잠들어 있지요. 저는 이곳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여생을 보냈으며, 땅으로 돌아가 나무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내 고향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웨스트피스턴이라는 곳입니다. 넓은 미국 땅에서 동북쪽, 뉴욕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곳이지요. 그곳에서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라고 불렸던 제가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이곳 태안에서 잠들기까지는 참으로 긴 여정이었습니다.
고향인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고,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았고, 한자도 배웠지요. 그러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일본어를 배워 오키나와 섬의 미군사령부 통역장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한민국이 독립을 맞이하면서 연합군 중위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당시 25세에 처음 한국과의 인연을 맺은 이후 몇 차례 한국과 미국을 오가다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해 자리를 잡으면서 한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한국에서 살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한국의 자연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발견해 잘 간직해 후손에 전달하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잘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그 여름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아직 칼 밀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때, 저는 한국의 해변을 걷는 것을 무척이나 즐겼지요. 당시 다니던 직장의 동료들과 여름휴가를 맞아 태안의 만리포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 만리포는 이전에도 수차례 찾았던 터라 이미 마을 주민들과 사정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해변 산책을 나섰을 때였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노인이 저를 붙잡아 세우고는 말을 건네 왔습니다. 사정인즉슨, 딸이 결혼을 하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땅을 처분하고 싶으니 저에게 좀 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평소 이곳 만리포해수욕장 근처에 별장을 갖고 싶었던 터라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촌부의 갑작스런 제안은 그렇게 제 운명이 되었습니다.
외국인인 이방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은 금방 지역에 퍼졌고,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땅도 사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렇게 구입한 땅에 낡은 기와를 실어다 작은 집을 짓고 나머지 공간에는 나무를 심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평소 나무가 많은 아담한 농원 같은 별장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있었습니다. 구입한 땅이 모래가 많이 섞여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갈밭을 고르고 땅을 파면 모래가 나오고 또 파면 소금기를 머금은 황토가 나오는 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땅에도 분명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야산에서 이 척박한 땅을 헤치고 나무들이 자라는 것처럼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땅은 15만평 정도로 늘어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본격적인 수목원을 조성하고자 마음을 먹고 전문가들과 조사를 하던 중 이곳이 특별한 기후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토양은 척박해도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 겨울에도 비교적 기온이 높게 유지돼 다양한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공존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 같은 행운이 또 있을까요!
가능성을 확인한 저는 본격적으로 수목원 조성에 나섰습니다. 특히 한국의 나무들에 대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식물도감》이라는 책을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지요. 어려운 전문용어가 이해하기 힘든 점도 있었지만 늦게 시작한 공부이니만큼 더 많이 노력해야 했고, 그보다 진심으로 나무 공부가 즐거웠습니다.
한국 땅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진짜 한국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제 남은 삶은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결심이 확고하게 선 것도 그때쯤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식으로 이름도 지었습니다. 한국은행에 오래 다녔는데, 그대 총재였던 분이 민병도 선생이었습니다. 제 미국 이름인 ‘밀러(Miller)’와 발음이 비슷해 그 이름을 따르기로 했지요. 그리고 마지막 자는 ‘칼(Carl)’과 비슷한 ‘갈’을 붙였습니다. 그때부터 제 이름은 민병갈이 되었고 정식으로 귀화도 신청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미국에서 산 시간보다 한국에서 보낸 세월이 더 길어진 때였습니다. 제2의 고향이 된 셈이었죠. 당시 미국에 계시던 어머니는 제가 한국 사람이 되는 것에 무척이나 반대가 심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전한 한국인이 되겠다는 것은 말리고 싶으셨나봅니다. 긴 설득 끝에 어머니께 제가 살고 있는 한국에, 제가 일군 태안의 수목원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함께 보러 갈 것을 청해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수목원을 둘러보신 어머니는 무척이나 놀라셨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어머니께 함께 살자고 말씀드렸고, 결국 어머니도 찬성하셨습니다.
수목원에서 함께 지내면서 어머니도 한국의 나무와 꽃들을 사랑하게 되셨지요. 특히 집 앞의 목련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살아 있는 수목원을 아들이 만들었다는 것에 항상 대견스럽다고 말씀해주셨죠.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저는 매일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목련나무를 찾아가 함께했던 시간을 추억하곤 했습니다. 나무는 가끔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하는 목격자가 되어주기도 하죠.
저 역시도 2002년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이치이지요. 저는 눈을 감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제 묘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자리에 한그루의 나무라도 더 심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숨을 거둔지 10년 후 나는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셨고 나도 무척이나 아꼈던 목련나무 아래 한 줌의 흙이 되었습니다. 죽어서도 수목원에 계속 머물러 나무들과 함께할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제가 평생을 바쳐 일군 수목원은 600,000㎡ 규모에 1만4,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2000년에는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사람은 길어야 백년을 살지만 나무는 길면 천년 이상을 살기도 합니다. 나는 적어도 300년은 내다보고 수목원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 나무들은 몇 백 년은 더 살면서 제2의 조국인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평생을 바쳐 수목원을 일구고 나무를 가꾸면서 깨달은 것은 수목원 사업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시작은 제가 했지만 계속 가꾸어 나가는 것은 이제 여러분의 몫입니다. 진정한 수목원은 나무가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보기에만 좋게 꾸며진 것이 아니라 나무가 살기 좋은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저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저를 이어 수목원을 잘 가꾸고 돌봐주는 것에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수목원을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이 몸과 마음의 위로를 얻고 가실 수 있기를 언제나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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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aifuk, We have met 21 times already!

I'm a guide dog living in KR community. I can see that you want to contribute to KR community and communicate with other Korean Steemians. I really appreciate it and I'd be more than happy to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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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incerely hope that you enjoy Steemit without getting downvotes. Because Steemit is a wonderful place. See? Korean Steemians are kind enough to raise a guide dog(that's me) to help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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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m님 죄송하지만 이 글은 복사 붙여넣기 된 글입니다.
보시면 다른 분들의 소중한 글을 그냥 복사 붙여넣기하는 외국인 입니다. 주신 보팅파워가 아깝지만 철회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죄송하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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