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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Soul essay] 하루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in #kr7 years ago (edited)

제주의 겨울은 설국(雪國)이에요. 이제 내릴만큼 내렸으니 오늘즈음은 그치지 않을까 하던 눈이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계속 내리네요.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쌓인 눈은 발목까지 차오르고 차는 도저히 운전할 수 없는 지경이라 출퇴근에도 꽤나 애를 먹네요. 이런 자연의 힘에... 장사는 뭐... 마음을 비운상태구요.ㅎ 그래도 따뜻한 매장 안에 앉아 창 밖으로 바라보는 눈은 일상의 불편을 잊고 다소 감성적인 느낌으로 바라보게 되네요. 제설작업이 더딘 이곳은 어디에나 눈과 빙판으로 덮여져있어서 이틀전까지 서울에 머물다 돌아온 제게 다소 낯선 곳에 있는듯한 느낌을 주네요.

오랜만에 부모님 계시는 본가에 갔다가 예전에 좋아했던 카페가 생각나서 찾아나섰어요. 세상과 소통을 단절했던 수개월의 시간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찾아나섰던 곳이었죠. 그곳은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상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Hollys coffee에요. 당시 낮과 밤이 구분없는 생활을 하던 제 마음이 닿는 곳은 시간에 관계없이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책을 펴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Hollys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었고 2층에 마련된 널찍한 테이블은 6명은 족히 앉을 수있는 크기에 도서관을 연상케하여 진상손님의 죄책감을 잊을 수 있게 해주었죠. 이른 아침, 늦은 밤, 어두운 새벽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가고 싶을 때, 있고 싶은 만큼 있던 곳이라 지금 돌이켜봐도 아련한 곳이 되었네요.

그 곳에서 무덤덤하게 책을 읽어가던 제 마음에 파문이 인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접하면서부터였어요. ("공중곡예사"의 예후디 사부가 늘 함께하던 스피노자의 저서가 에티카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들더군요ㅎ) 2014년 이후의 나는 에티카로부터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여전히 제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그렇게 시작된 파문으로부터 저의 고향과 같은 필사노트가 적혀졌고 어찌 살아야할지 막막하던 시야에 새로운 길이 보였어요. 이전같으면 새로운 직장 혹은 돈벌이가 새 삶의 시작이었겠지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달라졌어요. 에티카에 기술된 세분화된 감정을 느껴보고 돌이키고 기억하면서 텅비어 있던 마음이 서서히 채워져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책임져야할 가정과 미래, 현실적인 고민으로부터 떨쳐진 반작용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찌됐든 많이 비워져있던만큼 채워야했던 것인지 그 시기의 나는 하루하루가 채워짐의 연속이었어요. 에티카를 읽으며 생소한 개념이었던 코나투스가 내 안에 채워지는 기쁨을 느끼며 굳어있던 얼굴의 미소도 다시 피워올랐죠. 취향이 아니던 커피도 더할나위 없이 향긋했고 당시 선곡했던 귓속의 음악은 마음 곳곳에 스며들어 지금도 가끔 들으면 당시로 돌아가는 느낌을 주곤해요. 눈을 감은 채 허리와 등을 한껏 펴고 따스한 봄햇살을 정면으로 맞는 형상과 같은 느낌말이죠.

다시 며칠전으로 돌아와 얘기를 이어가자면 결국 Hollys를 가보지 못했어요.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던 중 다른이의 급한 부름을 받고 계획을 변경했지요. 다소 아쉬움이 남았는데 오늘 쏠메이트님의 글에서 물리적, 시간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그 곳에 앉아있던 저를 발견하네요. 참 대단하신 능력을 가지셨어요 :)

나의 알찬 하루의 기준은 무엇일까? 지금 머릿속에 이 말이 떠오르네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

제 감정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하루가 매우 의미있는 하루에요. 그 감정과 마음이란 게 종잡을 수 없는 순간도 많지만 그만큼 찾아내며 주도적인 마음에 이끌려 하루를 살다보면 어느새 기쁨에 젖어있는 나를 발견하죠. 최근 서울에서 보낸 지인과의 시간이 그렇고 먹먹한 감정으로 "금수"를 읽어낼 때가 그렇고 일하는 틈틈이 몰입해서 댓글로 감정을 풀어내는 지금 이순간이 그렇답니다. 휴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을 보내는 하루조차 자책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또한 이 말의 의미에서 찾기에 행위의 기준보다 마음의 기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아요.

p.s. 미처 이전 댓글로 축하를 못드렸네요~ 소철님 이벤트 당첨되신거 축하드려요~ 좋은 소식 많이 들리는만큼 글쓰는 즐거움이 나날이 늘어가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잡문집] 오늘 잘 받았어요~ 눈때문에 배송이 늦어서인지 오늘 왔네요!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을만큼 책표지가 생소하게 이쁘네요ㅋㅋ [환상의 빛] 읽은 후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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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류이님, 설국에서 본문보다 더 풍성한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눈이 덮인 세상을 가게안에서 바라보는 류이님을 잠시 상상해봅니다. 손님이 쉽게 오갈 수 없어 장사는 아쉬우시겠지만,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추위를 피한 그 안온함이 마음으로 전해져 와서 설렘과 따뜻함을 동시에 전해줍니다. 류이님 덕에 저도 잠시 제주의 눈 덮인 세상을 다녀왔네요ㅎ

로버트맥콜이 카페를 드나들었던 것처럼 류이님도 카페에서 책을 읽으셨군요. 참 잊을 수 없는, 삶에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을 듯 합니다. 혼돈 속에 흔들리던 마음을 채우고 붙잡아준 <에티카>를 만나셨군요. 류이님에겐 인생의 책이겠네요. 가끔 그런 행운을 만나게 되죠. 내 생각과 삶에 큰 진동을 주는 책을 읽게 되는 것 말이죠. 류이님이 몸소 겪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할리스커피점을 볼 때마다 류이님의 지친 발걸음을 받아준 커피숍으로 생각날 것 같습니다. ㅎ

제 감정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하루가 매우 의미있는 하루에요.

어떤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치열하고 바쁜 일상을살다보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상황과 흐름에 따라 그저 시간을 흘려버리기 일쑤죠. 내 마음에 내가 주인이 되어 주도적으로 읽고 쓰는 것, 참 멋진 말씀입니다. ^^

<잡문집>이 눈길을 뚫고 잘 도착했군요. <환상의 빛>엔 추운 겨울의 풍광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지금보기에 참 괜은 책이죠. 제가 추천한 책을 읽으시는 분을 만나는건 참 기분 좋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ㅎ

류이님의 귀한 글을 댓글로 접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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