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성의 위험

in #kr7 years ago

판화는 처음 찍어낸 것이 가장 그 가치와 가격이 높다고 한다. 수 많은 장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장점에 누구나가 가질 수 있지만 계속 찍어낼수록 뒷장은 가격은 하락된다.
이를 복제품의 한계라고 비판해야 할 것인가?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은 이 시대에 존재했다면 글 잘쓰는 파워 블로거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인터넷 폐인이 되었을 법한 인물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는 현대사회의 징후를 '기술복제'에 초점을 맞추어 복제가 예술적 생산 그 자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쏟아지는 자본주의 등장과 함께 그의 논문은 지금의 현대사회를 반영, 그 예측성의 일치에 지속적으로 재생각하게 하는 긍정적인 평을 받는 논문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복제가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했다. 아우라는 그의 예술이론으로, 예술작품에서의 고고한 '분위기'를 뜻한다. 유일하게 원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사진이나 영화 같은 대량생산적인 복제 작품에는 아우라가 생겨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영화산업의 발달로 필수적 문화로서 자리를 잡은 복제품인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그것들과 그들은 더 증가할 것이다.
'영화'가 예술이다 아니다 논하는 문제점은 살짝 미루어놓고 그가 주장하는 점을 정리하자면 이 복제성이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대중이 가지게 되는 위험성을 알아차려야 한다. 「…제의에 기초를 둔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자리에 다른 실천, 즉 정치에 기초한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대신 들어섰다.」에서 처음 이 문장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을 가지나 '정치'라는 단어에서 문맥을 감 잡을 수 있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전쟁이후로 파시즘과 나치즘이 성행하였다. 그는 파시스트를 비판하며 그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화를 철저히 악용으로써 이용하였다고 생각했다. 각종 매체 중에서 특히 영화가 파시스트 정치를 예술화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 강력한 지도자의 복종에 존재할 수 없어야 될 더 큰 아우라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대중은 비판적이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공산주의가 폐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벤야민이 말하듯이 예술의 정치화로서 파시즘에 응답하고 있다. 완벽히 사라질 수 없는 이데올로기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침투될 수 있다. 대중이 위험성을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은 지금 발생되고 있는 참변이 그가 예측한 점에 가장 가까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쉽고 가까이 향유될 수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소비할 뿐, 논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할리우드는 수용자인 대중이 소비에 중점을 둔다는 것을 이용하여 시각적인 효과와 스펙타클을 양산해낸다. 끝장에서 그는 인류 자신이 관조대상이 되어 자신의 파괴를 일등급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케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맹목적인 순응이 자신의 파괴에 다가간다는 것 이다.

벤야민이 죽고난 후에서야 1950년대에 영화는 문학작품과 동등한 위치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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