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novel] 제3화 뒤집어진 학당 2013.01.21. 별점9.83 댓글143

in #kr7 years ago (edited)

초류향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정확히 열흘 뒤였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주름 가득한 늙은 노복(老僕)의 얼굴이었다.

“……으어억!”

“저, 정신이 드셨습니까, 도련님?”

초류향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릿속이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흙탕물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는 사이사이로 알 수 없는 지식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들. 열심히 그것들을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을 때.
늙은 노복이 갑자기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덩치 큰 소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팽가호였다.

“이놈아, 이제 일어난 거냐?”

그는 오자마자 침상 옆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더니 초류향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군.”

초류향은 피식 웃었다.
팽가호는 모르겠지만 지금 초류향은 지극히 건강했다.
아니, 오히려 몸 안에서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리며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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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던 거지?”

“열흘이다, 이 미친놈아.”

“열흘?”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너 때문에 장 노인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아마 너희 집에도 연락을 보냈을 거다. 중간에 껴서 마음고생 엄청 하겠구만.”

초류향은 무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할아범.
장 노인은 본가에서부터 이곳까지 따라와 그의 모든 뒷수발을 들어 준 고마운 사람이다. 집안의 아주 오래된 가신이었기에 비록 하인과 주인의 신분이었지만 초류향은 할아범에게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마도 자신 때문에 본가에서 문책당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잘 말해 볼게.”

“너도 인간이면 당연히 그래야지. 장 노인이 나도 부르고 의생도 부르고 아주 난리를 피웠어. 너 하나 살리겠다고.”

“그렇게까지 했나?”

초류향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상체를 일으키려했다. 그러자 팽가호가 힘으로 그것을 저지하며 말했다.

“그냥 누워 있어. 열흘 동안이나 열병에 들떠 누워 있었으니 지금 당장 움직이면 근육들이 놀랄 거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생각해 보니 지금 당장은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한데 조금 신기했다. 그냥 잠깐 누웠다가 일어난 것 같았는데 벌써 열흘이나 지나 있다니?

“서가에서 쓰러져 있는 널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거 아냐?”

“뭐?”

“유기학당 역사상 서가에서 책 읽다 과로로 쓰러진 놈은 네놈이 최초란다, 최초.”

초류향은 쓰게 웃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한 걱정을 시켰네.”

“젠장, 책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곳에서 쓰러지냐?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놈이다, 너는.”

과로가 아니었지만 굳이 입을 열어서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
아직 초류향 본인조차도 그때 있었던 일이 현실인지 착각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쉬어, 난 이제 의생을 불러 주고 가 볼게.”

“그래.”

밖으로 나가려던 팽가호는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약간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걱정 좀 끼치지 마라 이놈아. 허약해 가지고는.”

“…….”

초류향은 아무런 대꾸도 해 줄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팽가호의 마음이 따스하면서도 한편으로 굉장히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의생이 들어와서 이것저것 진맥을 하고 약을 챙겨 주고 나간 후에야 비로소 초류향은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뭘까?’

몸 안에서 무언가가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었다.
정말 책에 적혀 있었던 대로 초월적인 힘을 얻는다든가 어떤 엄청난 조화를 부릴 수 있게 된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초류향은 예전부터 남들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본인이 가진 최대의 강점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초현실적인 힘을 얻었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실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뭐지?’

아까부터 무언가 머릿속으로 의문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었다. 마치 머릿속에 있는 어떤 알 수 없는 존재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답도 같이 생각났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초류향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의 영상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림 속의 그 노인!’

노인이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초류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머릿속에서 들렸던 설명은 모두 노인이 해 주었던 것이다.

[애송이, 이제 정신이 들었더냐?]

음성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그 뜻이 주입되는 특이한 말이었다.
초류향은 잠깐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어서 대답했다.

“예. 승상.”

노인이 피식 웃었다.

[내 신분이나 이름을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 잘도 거짓을 말하는구나.]

노인의 말에 초류향은 얼굴이 빨개졌다.
머릿속에 들어와서 그런지 초류향의 생각을 다 읽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에게 거짓을 말할 수가 없다.
곤란한 일이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라…….”

초류향은 뻥치지 마!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웠다.
의외로 노인은 거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됐다. 사람의 신분이나 이름은 사실 쓸데없는 허울일 뿐이지. 아무튼 아직은 이렇게 의식을 형상화해서 말할 수 있는 시간은 너에게 그다지 길지 않을 거다.]

아직은? 그렇다면 나중에는 길게 말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자마자 노인이 즉각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군. 맞다. 네 녀석 생각대로 나중이라면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나중의 일이다.]

굳이 입을 열어 질문하지 않았는데 생각을 읽고 노인이 대답했다.
이건 꽤나 편리한 방식이었다.

[네 육체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내가 준 능력을 펼치기에는 다소 불편한 점이 많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이겠지.]

어떤 능력들이 있는 것일까?
초류향이 또 그런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노인이 대답했다.

[궁금하더냐, 애송아?]

당연히 궁금했다.
책에 적혀 있던 대로라면 축지법을 쓰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런 능력이 아닌가? 사실이라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읽었음일까?
노인의 얼굴이 퉁명스러워졌다.

[어린놈이 도둑놈 심보가 대단하구나. 애송아, 어찌 그런 것을 거저 얻으려 하느냐? 네놈이 앞으로 얼마나 열심히 수양하느냐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를 것이다.]

그럼 지금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건가?
초류향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러자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애송이치곤 제법 산법의 기초를 잘 닦아 놨더구나. 밖에 나가 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이다.]

무슨 의미일까?
초류향은 점차 피곤함을 느끼고 서서히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이 작게 투덜거렸다.

[아직은 여기까지가 한계로군. 의식을 형상화하는 데 너무 많은 정신력을 소모하는 편이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녀석이라도 얻은 것이 어디인가? 앞으로 차분히 가르쳐서 쓸 만하게 만들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보다 나중이 더욱 기대되는 녀석이었다.


“알아봤냐?”

“예. 헌데 생각보다 일이 조금 번거롭게 되었습니다. 교주님.”

“왜?”

“교주님께서 찾으시는 산법의 일인자는 공교롭게도 황실에 있다고 합니다.”

“황실?”

“그렇습니다, 교주님.”

커다란 대전.
그곳 중앙에 화려하게 장식된 태사의가 있고 그곳에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다소 장난기가 있어 보이는 얼굴에 순해 보이는 인상. 하나 그의 실체를 안다면 누구도 중년 사내를 우습게보지 못할 것이다.
그가 바로 현 천마신교(天魔神敎)의 교주(敎主)이자 현 무림을 쥐락펴락하는 열다섯 명의 초인 삼황오제칠군(三皇五帝七君)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 중에서도 최고라 손꼽히는 삼황(三皇). 그리고 중년 사내는 바로 삼황의 하나인 암흑마황(暗黑魔皇) 공손천기(公孫天器)였다.

“젠장 진짜 번거롭게 됐군.”

공손천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보고를 올리고 있던 혈의인이 신중하게 말했다.

“속하가 직접 움직인다면 데려올 수 있나이다.”

“얼레? 황궁 담이라도 넘게?”

“명하신다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혈의인이 충심어린 목소리로 대답하자 잠시 고민하던 공손천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무리하지 말자. 아직은 되도록 황실과 엮이는 건 여러 모로 좋지 않아.”

공손천기는 아쉽지만 포기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차선책은? 가져왔겠지?”

혈의인은 곧장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누구지?”

“황실에 있는 산법의 일인자인 주호유(周虎柳)라는 자를 제외하고 최고라 손꼽히는 자는 이번에 주호유에 밀려 낙향한 조기천이라는 자로서, 현재 그가 가장 유력합니다.”

“조기천? 그놈은 어디 있는데?”

“지금 유기산법무예학당이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기산법무예학당? 그건 또 뭐야?”

“산서 지방에 있는 학당입니다. 명문 세도가의 자제들을 위해 만들어진 학당으로 그 규모가 중원 최고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래? 근데 왜 난 처음 듣지?”

공손천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혈의인이 재빨리 말했다.

“산서 지방의 학당이기도 하고 무림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어 보고가 올라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실 학문으로는 유명하지만 가르치는 무예는 졸렬한 수준이라 본 교가 신경 쓰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그놈으로 하자. 만만해 보이네.”

“조기천을…… 데려오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놈이 적당해 보이는군. 낙향했으니 할 일도 없겠다, 데려와서 이번 일에 써먹으면 딱이겠다.”

공손천기는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 녀석 정도면 그 진법을 파훼할 수 있겠지?”

“진법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요상한 수식들을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그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어먹을 본 교에 이렇게 인재가 없을 줄은 몰랐네. 외부에서 사람을 구해다가 써야 될 줄이야.”

혈의인은 공손천기의 투덜거림에 송구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조기천인가 뭔가 하는 놈은 언제까지 데려올 수 있어?”

“속하가 직접 가서 데려오면 한 달 내로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도와줄 애들 몇 명 데리고 가. 가기 전에 네가 맡은 다른 일들은 삼비(三秘) 녀석에게 인수인계해 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이번 일은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돼. 아무래도 본 교의 영역 바깥에서 벌이는 일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존명.”

혈의인이 오체투지한 후 자리에서 사라지자 공손천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겸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송구스럽지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내가 고작 무공 비급 하나 때문에 지금 이 생난리를 피우는 것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야.”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옵니까?

“가치는 무슨. 무공이라는 게 별거냐? 익히는 놈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인물.
교주 직속 호위대인 마라천풍대(魔羅天風隊)의 대주 임학겸(林鶴謙)은 교주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천하제일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무공을 지닌 교주다. 그런 그가 무공이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니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이다.

“에휴,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영광을 더 보겠다고, 비급 하나 때문에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몸도 움직이고, 피곤해 죽겠다. 이러다 진짜 과로로 쓰러지는 거 아닌지 몰라.”

―지금이라도 장로님들에게 맡기시고 교로 돌아가 쉬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공손천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옹졸한 늙은이들한테 이런 험한 일을 맡기라고? 나중에 뒤에서 무슨 욕을 들어 처먹으려구? 됐다. 그냥 내가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해야지.”

임학겸은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뭐라 뭐라 투덜거려도 항상 교를 위해 애쓰는 교주님이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지녔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겉으로 내세우지 않고 마음으로 상대방을 감화시키는 진정한 의미의 교주인 것이다.

“월인도법이라고 했었나? 그런 게 굳이 본 교에 필요할까? 지금도 충분하잖아, 무공은.”

―그런 위험한 물건이 다른 우매한 놈들 손에 들어가 함부로 휘둘리는 것보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여러 모로 현명한 일인 것 같습니다.

공손천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매사를 장난스럽게 넘기는 그답지 않게 이번에는 제법 진지한 한숨이었다.

“그런 건 나도 알지. 그런데 왜 이렇게 이번 일이 내키지 않는지 모르겠다.”

―…….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괜히 불안하기도 하고, 조만간 뭔 일이 생길 것만 같구나.”

말을 하던 교주는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겸아.”

―예, 교주님. 하명하십시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난 말이다, 사실 귀찮은 걸 매우 싫어해.”

공손천기는 말을 하며 장난스럽게 툴툴 웃었다.
그는 번거롭고,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걸 아주 병적으로 싫어했다.
심지어 무공을 배울 때도 단지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주 전용 무공이었던 수라환경(修羅幻經)의 수백 개의 초식을 단 열 개로 줄이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인해 본래도 강력했던 수라환경이 무려 네 배 가까이 위력이 증폭되었다.
임학겸은 현재 교주인 공손천기가 만약 귀찮음을 감수하고 강호에 나가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 천하는 천마신교의 이름 아래 일통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역대 교주 사상 최고의 재능을 지닌 인물이 아닌가?

“젠장, 사실 톡 까놓고 말해서 교주씩이나 되면 그런 귀찮은 거 안 해도 되잖아? 난 그렇게 알고 사부에게 교주직을 물려받았어. 근데 최근 들어서 이거 사실은 내가 사부에게 사기 당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해.”

―……속하가 불민하여 잘 모시지 못해서 항상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내 말은.”

공손천기는 목을 좌우로 돌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다. 최대한 빨리 교로 복귀하고 싶구나.”

―그렇게 될 겁니다.


유기학당.
그곳의 대회의실에서 지금 노학자들끼리 작은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이번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의심되는 학생이 있소이다.”

“부정행위라니요?”

“조기천 선생은 짐작하고 있지 않소?”

풍채 좋은 노인. 이곳에서 시경(詩經)을 가르치고 있는 유현국(遊絃局) 선생은 슬쩍 옆에 있는 조기천 선생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나 정작 당사자인 조기천은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소? 이번에 산법 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한 녀석. 그 녀석 말이오. 대체 언제 쯤 체벌하실 생각이외까?”

조기천 선생.
평소에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지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위인인 그가 급격하게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초류향이라는 아이가 들어와 산법수리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한 것은 솔직히 조기천이 보기에도 의외의 결과이긴 했다. 하나 그곳에는 어떠한 부정도 없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조기천이었기에 지금 이 이야기가 왜 여기에서 나와야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따름이다.

“조기천 선생은 이 문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오? 공개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있소이까?”

“흐음…….”

유현국.
고고한 유학자인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이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당 부분 이해도 됐다. 산법이라는 학문에 대해 잘 모르는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음이다.

“무슨 말씀이라도 해 주시오. 그대 관할이 아니오? 답답하구려.”

이렇게 공식적인 장소에서 거론한 것을 보니 아마 단단히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대개의 유생들이 부정이나 비리 등에 굉장히 민감해했다. 그리고 이렇게 민감한 부분을 이야기할 때는 두루뭉술하게 설명해선 안 된다. 막 입을 열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데 옆에 있던 서체(書體)담당 선생인 조유천(調柳川) 선생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하더이다. 그 녀석 무언가 조작이라도 한 것 아니오? 그것도 아니면 사전에 문제가 미리 유출되었거나.”

“그럴 수도 있겠구려.”

유현국 선생이 맞장구를 쳤다.
지금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초류향의 답안지였다.
아니, 그 답안지 전체가 만점을 맞은 것은 둘째 치고 진짜 문제시되었던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모두에게 할당된 시험 시간은 한 시진(2시간).
보통의 경우 산법 시험은 그것으로도 시간이 모자라 다 풀지 못하는 게 대부분인데 초류향은 달랐다. 앉아서 백여 개가 조금 넘는 문제를 푸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각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사전에 답을 미리 알고 술술술 써 내려가야 나올 수 있을 시간 아닌가?
당시의 시험 감독관들은 초류향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냥 시험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했을 정도였다. 조기천 선생은 눈앞에 놓인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본래의 담담한 신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본인이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오만?”

“그게 말이나 되오? 천재라 불리는 남궁옥빈도 문제를 푸는 데 반 시진이 걸렸소.”

조기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녀석과 이 일이 무슨 관계가 있소?”

“그, 그냥 그렇다고 예를 든 것이외다. 그리고 생각해 보시오? 이 많은 문제들을 반각 만에 푼다는 것이 실로 가당키나 한 것이외까?”

다른 학자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기천 선생만 가만히 있었다.
하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법했기에 딱히 화도 나지 않았다.
이들은 모르는 것이다. 산법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심오한 학문인지.
지금에야 이렇게 다들 선생이라는 직함을 달고 함께 어울려 있지만 뒤돌아서면 산법이라는 학문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는 조기천이었다.
천한 장사치들이나 배우는 저급한 학문. 산법을 단순한 숫자놀음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산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이었다.
그랬기에 이런 반응이나 편견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쪽에 재능이 있고, 노력이 받쳐 주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소.”

“허허, 그러면 정말 고작 열한 살 먹은 아이가 이 많은 문제를 촌각 만에 계산해서 즉답을 내고 그것을 적어 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물론이오.”

조기천의 말은 단호했다.
실제로 조기천 선생 그 자신도 그게 가능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조기천 역시 현역에서 물러난 지금도 이 정도의 문제는 보는 즉시 답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말로 엄청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노력을 들인 결과였지만.
그것을 초류향이라는 꼬마아이가 해냈다는 건 조기천에게도 신선한 놀라움이 있었다. 하지만 내심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만한 노력을 들였으면 그 정도의 보답이나 결과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하나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스스로의 상식만이 옳다고 여기는지 조기천의 말은 귀에도 담지 않는 듯 했다.

“난 믿을 수 없소. 본인은 이 녀석만 따로 재시험을 치르길 원하오.”

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일을 벌이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기천은 일단 침착하게 생각해 보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어 보이오만?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오.”

다시 시험을 봐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럼 굳이 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뻔한 인력과 심력,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그런 것은 체질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기천이었다.

“이건 나 혼자만 아니라 학생들도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아니겠소? 상당수의 학생들이 이번 결과에 불만을 품고 나를 찾아왔소. 그래서 이렇게 드리는 말이외다.”

조기천은 그제야 이렇게 강하게 압박해 오는 이유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여기에 있는 노학자들도 불신하고 있는 마당에 학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시험을 포기하고 나가는 것으로 보였던 녀석이 갑자기 수석을 차지했다. 게다가 현재 학당 내에서 나이도 가장 어리지 않은가?

‘어리석구나.’

쓸데없는 열등감이었다.
조기천은 이런 것에 감정 소모하느라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 것은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 유기학당에서 한 과목 수석을 차지하면 나름의 혜택들이 있었다. 수석을 차지한 이들에게 장려금이라는 명목으로 상당한 액수의 금전을 지원되었고, 또 혼자만이 공부할 수 있는 학방(學房)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 때문일까? 학생들은 초기에 나름 다들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학업에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것도 남궁옥빈이라는 걸출한 천재가 등장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남궁옥빈이 학당에 들어와 줄곧 전 과목에서 수석을 차지해 버리니 다른 아이들은 열등감만 심각해질 뿐이었다.
각 과목을 담당으로 가르치고 있던 노학자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고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암묵적으로 다른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과외수업을 해 주는 형태로 나타났다. 어떻게든 남궁옥빈 외에 다른 수석자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남궁옥빈은 그런 것을 넘어선 천재였기 때문이다.
노학자들도 사실상 모두 손을 놓았을 즈음 올해에 들어온 초류향이 갑자기 산법 과목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이건 묘한 일이었다.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조기천 선생이 뒤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 여긴 것이다. 항상 외톨이로 혼자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조기천이었기에 그를 그런 성격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기천 역시 그런 학자들의 심중을 눈치챘다. 이것은 초류향이라는 학생을 못 믿는다기보다는 그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라 봐도 되었다.

‘여기도 그곳과 똑같구나.’

황실에서도 이런 권모술수라든가 이전투구들을 많이 보아 왔다.
사람 사는 곳이 전부 다 이런 것일까?
뻔히 보이는 수작들이었지만 알면서도 그냥 당해 주었다.
그가 원하는 산법 공부에 크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면 어떤 것이든 허용해 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재시험을 원한다고 하셨소?”

“그렇소이다. 선생 모두가 참관한 곳에서 문제를 만들어서 그것을 그 자리에서 풀게 해서 시간을 보겠소.”
조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맨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유현국 선생. 그가 자신을 거북해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본래가 붙임성 없고, 사교성이 없었던 조기천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던 점도 있다. 그게 이런 방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찌되었든 벌어진 일.

“좋을 대로 하시오.”

“내일 당장 가능하겠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물론이오.”

그렇게 초류향의 재시험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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