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r ] [ kr-novel ] 제2화 내 이름은 제갈량

in #kr7 years ago

조기천 선생의 산법 강의가 끝나고 초류향은 다리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팽가호를 내버려 둔 채 곧장 서가로 찾아갔다. 입구에서 간단한 신원확인 후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종이 냄새들과 함께 오래된 먹물 냄새들이 코끝을 스쳤다. 역시 여기는 한산했다. 초류향을 제외하고 이 넓은 서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한적함을 초류향은 좋아했다.
이곳 유기학당의 서가에는 아직도 초류향이 읽지 못한 산법책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을 읽는 것이 현재 초류향이 가진 유일한 낙이자 매일의 일과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초류향은 계산이라든가 셈하는 것이 참으로 좋았다. 게다가 집안도 표국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법과 만났고, 천성에 딱 맞았다.
정확한 계산식을 대입하면 어떤 문제든 항상 확실한 답이 나온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팽가호나 언극린 같은 이들이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초류향에게 있어서 산법이란 끊임없이 즐거움을 주는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오늘도 서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을 바라보고 있던 초류향은 행복한 듯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다 서가의 제일 구석진 곳. 산법 분야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의 제일 귀퉁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굉장히 낡은. 그래서 누렇게 색이 바래 있는 한 권의 책이 앞으로 조금 삐죽 나와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서 꺼내어 보았다.
월인삼라산법술해(月刃森羅算法術解) (上)
요란한 이름의 책이었다. 게다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원본인가?’

보통 이렇게 오래되거나 관리가 안 된 서적은 다른 누군가가 필서(筆書, 써서 옮김)를 해서 사본으로 갖다 놓았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책이 그랬다. 원본들은 대개의 경우 너무 오래전에 써진 것들이라 이곳에 놓아 둔 것은 거의 없었고, 보통의 경우 전문 필서가가 옮겨 놓은 사본들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때가 묻은 책은 여기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제법 희귀한 물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바로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행여나 찢어질지도 모르니까 조심스럽게 책의 첫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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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인연이 없어 남기지 못했던 것을 다음 생의 누군가와 닿기를 바라며 이렇게 책으로 남긴다.』
책의 서장 부분이었다. 상당히 깔끔한, 그러면서도 유려한 필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크기에 대한 기준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을 바탕으로 상대적인 크기와 양을 가늠한다.
도량형(度量衡, 길이, 무게, 크기들을 잴 때 필요한 단위)이나 측량법(測量法), 척관법(尺貫法) 등등의 용어가 바로 그것이며 이 모두가 세상의 일부분을 인간이 알 수 있게 공통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에 맞게 측정하는 것들이다.』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초류향도 알고 있는 내용.
예로부터 치수(治水)와 도량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황제가 가져야 될 필수 덕목이 아니었던가?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것에 관한 서적들도 많았기에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초류향도 알고 있었다. 초류향은 다음 장으로 서적을 넘겨보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도량을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을 수(數)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숫자로 세상을 표현한다고? 초류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궤변(詭辯).
본래대로라면 여기까지만 읽고 책을 덮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 글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초류향은 다시 뒷장으로 책을 넘겼다.
『남들은 내 이론을 단순히 미친 소리로 치부했다.』
초류향은 서책을 읽다가 뜨끔한 얼굴을 해 보였다. 자신도 사실 반쯤 미친 소리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론은 공감하지 않아도 글을 상당히 재미있게 서술했기에 참고 읽는 중이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느 시대건 선각자들은 배척받고 오해받는 법이었으니까.』
글쓴이의 자존심과 오만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아무튼 최초의 인간은 도량을 재고 평가하는 일에 인간의 몸을 그 표준으로 삼았다. 손가락 한 마디의 크기나, 손바닥 하나의 크기. 혹은 팔 전체의 길이 등등, 인간의 신체를 그 기준으로 해서 크기의 표준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라는 것이 저마다 다르고 일정하지 않았기에 좀 더 정확하게 그 도량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 필요에 의해 저울이라는 도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초류향은 속으로 이 부분에는 동의하며 다시 다음 부분을 읽었다.
『따라서 그 기준이 조금만 변해도 이 세상은 크게 바뀌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저울의 눈금의 크기가 지금보다 더 크게 벌어지거나 1척(30cm)의 기준이 지금보다 두 배로 커지면 세상의 재는 단위가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 아닌가?』
초류향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크기나 무게, 길이 등을 재는 단위가 지금과 다르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을 법도 했다.
『내가 후대의 인연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의 요지는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에 누구나 다 표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 다른 각자의 표준.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을 저마다의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해내었다.』
그것을 해내었다고?
그게 무슨 말일까?
『난 세상을 숫자로 보았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다.
이 세상의 모든 난제들이 한순간에 이해가 되었고, 모든 법칙들이 한 번 보는 순간 다 이해가 되었다.
평소라면 할 수 없었던 것들도 한순간에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걸음에 십 리, 이십 리를 갈 수 있는 축지법(縮地法)도 쓸 수 있게 되었고, 발을 굴리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구름처럼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손끝으로 비바람도 부릴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늘 아래 모든 천지조화(天地調和)가 내 손안에 있었다. 한순간에 초월자가 된 것이다.』
초류향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까지 읽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미친 소리가 재미있어서 읽긴 했지만 이 이상은 위험하지 않나 싶었다. 무언가 글쓴이의 흥분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초류향은 책을 덮지 못했다. 뒷부분에 뭐라 써 놓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의 끝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한계에 부딪쳤다.
그것은 바로 내가 깨달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아무리 나라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도 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망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몇 십 년이 지나고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기준이 달랐기에, 내가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하면 나와 똑같은 인간을 제외하고 아무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채 버렸다.』
초류향은 이제 담담한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왜 이런 허황된 이야기가 산법책으로 분류되어서 여기에 꽂혀 있었을까?
아마 제목에 산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기에 분류되어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죽기 전에 깨달은 그것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이렇게 글로 남겨 놓는다.
후대에 인연이 있는 자가 이것을 읽고 초월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걸고 그 방법을 남긴다.』
뒷장으로 넘기자 종이 한가득 온통 빽빽하게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제야 초류향은 알 수 있었다. 이 책이 원본으로밖에 존재하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이 숫자들 때문이었다. 이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필사해서 옮겨 적을 수가 없었을 터. 아무 생각 없이 그 숫자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

숫자들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갑자기 눈앞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눈앞이 핑 돈다고 해야 할까?

“어라?”

초류향은 잠시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른 후 다시 책을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종이에 적혀 있는 숫자들이 갑자기 몇 번 꾸불꾸불 거리는 것 같더니 곧장 하나로 섞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는데 하나로 섞인 숫자들이 곧장 어떤 형상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고집 세고 차가운 인상의 노인.
초류향은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숫자들이 적혀 있었던 종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지금 뜬금없이 숫자가 그림으로 바뀐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노인의 그림으로 변한 숫자가 갑자기 말(言)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태 눈깔을 가진 놈들은 보물을 봐도 알아보지 못할 텐데, 이것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너에게도 이쪽 분야에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말이 되겠지.]

“…….”

초류향이 너무 놀라서 입을 헤 하고 벌린 상태로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림이 다시 말했다.

[후대의 애송이에게 내 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 써 주느라 꽤나 힘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성공한 모양이군. 너는 이것을 보았으니 내 깨달음을 받아 갈 자격이 있다.]

일순 그림 속의 노인이 시선을 돌려 초류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묘하게 생동감이 넘쳐서 초류향은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애송이, 너는 내 깨달음을 받아 보겠느냐?]

초류향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 속의 노인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신만 살아남아 과거 노인의 모습 그대로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요술(妖術)이라 하더라도 엄청난 것일 텐데 노인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산법(算法)이 아닌가?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초류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시선에 초류향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자기 자신이 미친 것인지 아닌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런 일은 신중해야 했다.
노인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후대의 제자가 아둔하여 눈앞의 고인(高人)이 어떠한 분인 줄 모르기에 묻겠습니다. 실례지만 존성대명(尊姓大名)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십니까?”

책에다 대고 이렇게 정중하게 이름을 묻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지금 초류향은 몹시 진지했다.
단순히 짐작이지만 이런 엄청난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면 분명 흘러간 역사 속에 한 번쯤 그 이름을 남겼을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기에 이 질문은 반드시 해야 되는 질문이었다.
다행히 초류향의 질문에 대한 답은 곧장 돌아왔다. 그림 속의 노인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량(亮), 성은 복성으로 제갈(諸葛)을 쓴다.]

초류향은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림 속 노인은 짐작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제갈량(諸葛亮).
그가 알고 있는 촉한의 명재상이었던 와룡(臥龍)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이름이 아닌가?

‘이거 미친 새끼 아냐?’

초류향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제갈공명(諸葛孔明).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보면 촉한의 승상 제갈공명은 역사에 첫 등장할 때부터 그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 찾아감)로 시작하여 읍참마속(泣斬馬謖, 군기를 세우기 위해 제갈량은 아끼던 마속을 베어 죽임), 사공명 주 생중달(死孔明 走 生仲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침) 등등의 유명한 고사성어가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엄청난 업적들을 쌓은 인물이 아닌가?
대부분이 그의 뛰어난 지략 위주의 이야기들이었지만 그에게는 지략 이외에도 여러 가지 신비로운 소문들이 나돌았다.
사실상 제갈공명이 천하삼분지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보면, 그가 전투에 앞서 하늘의 천문을 읽은 뒤 바람을 바꿔 승리를 쟁취하는 부분이 나온다.
또, 그가 고안하여 만든 팔진도(八陣圖)에 오나라의 지략가 육손이 갇혀 죽을 고비에 처했었다든가 하는 부분들. 다소간의 과장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다고 암시하는 부분들이 이렇듯 종종 나왔다. 그랬기에 죽은 지 몇 백 년 된 인물이지만 제갈공명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때문에 초류향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촉한의 승상이었던 그 제갈무후가 맞습니까?”

초류향의 질문에 그림 속의 차갑고 오만한 노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어떤 깊은 회한이 담긴 얼굴이었다.

[맞다. 내가 촉한의 제갈공명이다.]

본인이 맞다고 시인했지만 쉽사리 믿기는 어려웠다. 이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거물이었던 것이다.
미심쩍음이 있지만 일단 지닌 바 능력은 진짜인 듯하니 믿는 척하기로 했다.

“후대의 제자에게 승상께서 가르침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이미 죽어 버린 내가 너에게 승상이라 불릴 이유가 없다만. 뭐, 상관없겠지.]

하나 말과는 달리 노인은 기분이 좋은 듯 호칭은 애송이에서 너로 승격되어 있었다. 그러다 곧 평소의 오만한 표정으로 돌아가 손에 들고 있던 섭선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재능 있는 놈을 좋아한다. 네 인성이 어떠한지까지는 알 수 없다만 너의 재능만은 확실히 탐나는 것이구나.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 이제 내 필생의 깨달음을 받아 보거라.]

책 속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초류향이 그 심상치 않은 느낌에 움찔 몸을 떨었으나 그것은 점차 오색찬란한 빛깔로 바뀌더니 찬란한 서기가 되어 초류향의 전신을 감싸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엄청난 열기와 더불어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이 파도처럼 초류향이 의식을 덮쳐 왔다. 누군가가 억지로 머리를 열고 거기에 지식이라는 것을 들이붓는 듯한 느낌. 초류향이 머리가 쪼개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어 갈 때, 그림 속 노인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지금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은 기(技)도 아니고, 예(藝)도 아니다. 하늘이 허락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진리(眞理) 그 자체이니 아직 어린 네가 당장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나 그것은 네 몸 안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깨어날 것이니 조급해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초류향은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너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머릿속에 강제로 쑤셔 넣어졌다.
아직 미숙하여 채 완성되지 못한 초류향의 육신은 그 많은 정보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쓰러져 있는 초류향을 그림 속의 노인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앞으로 너를 통해 세상을 볼 것이다.]

제갈공명이라 밝힌 노인. 그는 갑자기 책 속에서 쑤욱 하고 걸어 나오며 쓰러져 있는 초류향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써 놓은 책을 보았지만 이렇듯 산법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실화시킬 수 있는 놈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하늘이 허락한 재능.
자신과는 다른 형태겠지만 그러한 것이 이 꼬마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이 꼬마에게 기대를 걸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군.]

과거 노인의 능력은 실로 초월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런 그가 이 세상에 남겨 놓은 힘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하나 그 대단한 노인조차도 이 힘이 한낱 어린아이 손에 들어가게 될지는 예상 못했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겠지만…….]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것 역시 의미 있는 유희가 아니겠는가?

[앞으로가 기대되는구나.]

최후의 무언가를 결국 보지 못하고 죽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왔었지만 허락된 수명이 그것밖에 되지 않아 볼 수 없었다.
아쉬움이 남았다.
그랬기에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육체를 벗어나 정신만 후대에 남겨 놓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평생에 단 한 번 부려 보는 고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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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벗어나 정신 만 남겨 놓는다
잘 보았습니다.

고마워, 내 입장이 좋길 바래.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매우 흥미로워 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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