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끝내 지켜내야 할 것은 사랑이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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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라는 수식 이외에 이중섭을 설명하는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할까. 이중섭은 평생을 어렵게 살았지만 굴하지 않고 미술가로 살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평생을 따라다닌 가난과 외로움

이중섭은 천재적인 화가였으나 그 호칭 앞에 언제나 ‘비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성장기는 부유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가난과 외로움이 그를 괴롭혔다. 어려서는 프랑스로 그림 유학을 가겠다는 포부도 있었고, 대학 시절에는 여러 평론가와 지인들이 극찬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아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종이에 그림을 그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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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사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며 살아온 이중섭. 모두 그러했듯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 시절을 그도 힘겹게 버티며 살았다.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원주, 부산, 제주로 피난을 다녀야 했고 생계를 위해 막노동판에서 등짐을 져야 했지만 그는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이중섭이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한국 이름 이남덕을 향한 사랑은 애절하고 애틋했다. 하지만 전쟁과 가난은 그들을 갈라놓았다. 극심한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결혼 7년 만에 일본에 있는 친정으로 건너갔다. 중섭은 남덕이 그리워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했으며, 남덕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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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망

6ㆍ25전쟁 시기 사랑하는 가족과의 가슴 아픈 이별이 불굴의 역작을 토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시대와 개인의 아픔 사이에서 예술을 통해 자신을 내보인 이중섭은 소 그림을 통해 선의 예술 경지에 올랐으며 그가 평생 꿈꿔온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해학과 웃음, 정감 어린 필치로 캔버스에 그려냈다. 이중섭이 오늘날에 빛나는 이유는 그의 예술세계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예술가가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 주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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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생의 마지막까지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하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1955년 이중섭은 1월과 5월에 두 번 전시회를 가졌다. 이 전시회가 잘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일본으로 건너가고자 했다. 하지만 두 번의 전시 모두 이중섭에게 희망이 되지 못했다. 전시회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는 실망했고, 실망의 상처는 그를 다시 좌절하게 만들었다. 이 일로 이중섭은 몸과 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해 이중섭은 정신병원을 세 곳이나 드나들 정도로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졌다. 1955년 7월 한 달 동안 대구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서울로 온 그는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 그리고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겨져 늦가을에 퇴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섭은 원래 자화상이 없는 화가였다. 그런데 정신병원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해서 스스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즉석에서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이때만큼은 평소 시원하고 강한 필법을 놓고 자신이 인내심 많고, 성실하며 미술가로서도 제법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연필로 세밀하고 꼼꼼하게 자신의 얼굴을 묘사했다.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화가로서 인정받고 받으려 평생을 애썼던 이중섭이었지만, 그의 뜻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56년 9월 6일,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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