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법 -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로부터

in #kr6 years ago

옛날 옛적 뽐내길 좋아해 새 옷 사는데 정신이 팔린 임금님이 살았습니다. 유명한 재단사 두 명이 이 나라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님은 좋은 새 옷을 한 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임금님에게 바보나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아주 특별한 천으로 근사한 새 옷 한 벌을 지어 올리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임금님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그 천은 어떻게 생겼을까?

재단사들이 천을 가져와 보여주자, 임금님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조화로운 무늬가 놓아졌고, 아주 부드러운 천이라는 설명에도, 임금님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재단사들이었단 말이죠. 값도 엄청나게 비싸다는 말이었습니다. 어쩌면 투명할 만큼 섬세하고,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천이어서 인지도 몰랐습니다. 임금님은 집중하려고 노력했고, 천을 대보고 치수를 다 재고 나자 천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보인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재단사들은 옷이 완성되었다고 가져와서 임금님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곤 돈 보따리를 챙겨 궁을 떠났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임금님은 신하들을 대동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신하들 역시 옷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쫓겨날 게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임금님의 행렬을 본 사람들은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네!" 갑자기 거리의 정적이 깨졌다. 모른 척, 못 본 척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외침이었다.



<The Naked Emperor” by Edward von Lõn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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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화의 의미는 모두들 알고 있을 겁니다. 임금님은 속았고, 군중은 두려워했으며, 어린아이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유명 재단사라던 그들은 옷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사기꾼이었고, 임금님과 신하들은 이 사기꾼들에게 당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옷의 가치는 오로지 엄청나다는 말뿐 보이지 않는 천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가격이 반영된 것이었고, 사기꾼들은 그저 그런 마음을 이용해 엄청난 돈을 챙긴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진실을 말한 어린아이가 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가치와 가격이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현대 미술 작품을 볼 때, "별 가치도 없는 게 뭐 이리 비싸?."라고 비웃고 싶어 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런 끽해야 어떤 미학이 담겨있는지 이해도 안 되고, 최악의 경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예술품의 가격을 갤러리와 중계상들이 뻥튀기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alvation Islands, detail, 2018, acrylic on printed fabric, 65in x 132in>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는, "진실"과 "속임수"의 관점이 아니라, 다르게 해석해 보면 또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 우화를 노동의 가치와 예술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치'란 기본적으로 노력과 보상이 함께 묶인 개념이며, 하나를 다른 하나로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바나에서 치타가 영양을 덮치는 경우, 매번 일격에 잡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영양을 잡기 위해 한동안 추격전을 펼쳐야 합니다. 영양이 도망가는 속도를 높이면, 치타도 추격하는 속도를 높이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치타가 추격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대게 치타는 열심히 달린 대가(노력)로 영양을 잡게(보상) 됩니다. 하지만 치타에게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놓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면 달리는데 들인 노력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치타에게 먹느냐 굶느냐는 영양을 노릴 때 그 가치, 즉 계속 추격하느냐 아니면 멈추느냐를 얼마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치타 이야기는 가치가 때로는 비대칭적 개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양의 경우에는 가치를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치타와 조우하면 열심히 달리는 것만이 최대한의 가치입니다. 삶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영양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바꿀 수 없었고, 열심히 도망가는 것만이 최대의 가치였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의사 결정 과정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형태와 진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 구성원들 간에 서로 노력과 보상을 교환하면서, 개인의 가치도 공유되고 통합됩니다. 오직 최선의 노력을 들여야만 가치가 보상되는 영양의 경우와 달라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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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가치 체계 또한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노력과 보상의 교환을 거치지 않고도, 가치를 계량하고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이 등장했습니다. 화폐의 발명은 인간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시간과 공간 간에 가치를 연결해 줌으로써 경제의 범위를 확장시켰습니다.

겨울에도 먹을 수 있게 되자 오이의 가격은 때에 따라 그 실제 가치와 다르게 화폐 가치(가격)가 바뀌게 되었고, 바다를 건너 여행할 수 있게 되자 집 또한 위치에 따라 실제 가치와 가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거 오이는 겨울에 재배할 수 없었고, 주택도 옮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 번 정해진 실제 가치에 따른 가격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집의 실제 가치와 가격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격은 실제 가치보다 더 자주 바뀝니다.

현대에 들어와 물건의 실제 가치와 가격 간의 차이가 점점 커지면서, 가치가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만들어 낼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노력 없이도 가치가 있는 물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치를 만드는 데는 공식적 방법과 비공식적 방법이 있습니다.

공식적 방법은 현재 디지털 세상에서 많이 유통되고 있는 암호화폐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화폐의 가치가 꼭 물적으로 담보될 필요는 없다는 인식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암호화폐는 물적 담보에서 완전히 자유로우며, 한 걸음 더 나가 정부나 기관의 담보도 필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거래의 확실성과 질서를 보장하는 교환 체계뿐입니다. 가치가 흘러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줌으로써, 가치가 스스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치 안개 울타리(fog fence)를 사용해 공기 중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위의 공식적 방법이 권위와 규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비공식적 방법은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합니다. OPEC 같은 국제 조직, 다이아몬드 같은 산업 분야 또는 미술계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역사상 언제나 권위를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어 왔습니다. 권위가 생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권위는 매년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미술계의 권위는 갤러리, 비평가 그리고 중개상들의 복합체입니다. 여기서 먼저 미술 작품의 교환 가치(가격)와 미적 가치(실제 가치)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미술 작품의 가치가 인위적 조작된 것이라고, 또는 미술 작품 자체가 가치의 저장 및 이전 수단이 되고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닙니다.

가치가 만들어지는 첫 단계는 희소성입니다. 희소성은 갤러리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들은 가능성 있는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를 추려내 유통 가능한 작품의 수를 결정합니다. 갤러리는 작품의 미적 가치는 물론, 미술계에서의 평판, 경험 및 이전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견 등의 요소를 고려해 작가를 선별합니다. 무엇보다 무명작가에서 유명 작가에 이르기까지 꾸준하면서도, 느리게, 그리고 예측 가능하게 작가들이 존재하도록 만듭니다.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생산량을 조절해, 다양한 작품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가치 상승을 유도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합의입니다. 좋은 비평은 작품에 두 번째 인생을 가져다주지만, 나쁜 비평은 작품의 인생을 망칩니다. 하지만 비평가들 사이에 합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비평에 무게가 실리기 때문입니다. 비평가 한 개인이 이런 합의 깨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것은 집단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면 미래를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합의가 필요합니다. 갤러리들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좋은 비평에 의해 굳어지고, 비평가와 중개상들의 평가는 다시 유명 갤러리들의 긍정적 판단에 의해 강고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선순환 고리가 갤러리와 비평가 사이의 합의 만들어냅니다.

미술 작품의 가치는 인위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위나 허위로 조작된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위에 언급한 합의는 무작위로 내리는 것이 아니며, 그런 시스템을 유지하고 내부에 평판을 구축하는 과정은 정당하고 정상적입니다. 미술 작품의 가치는 인위적일지 모르지만, 그 가치가 정해지는 과정은 진정하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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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재단사들이 사기꾼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가였고, 그들이 만든 보이지 않는 옷이 정말로 걸작이었다면?

그렇다면 재단사들은 임금님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전하는 임금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전하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전하의 옥체이옵니다. 소신들은 유명한 재단사며, 소신들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명성입니다. 다른 것이 들어가지 않아도, 이 두 가지가 만으로도 가장 좋은 옷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더 필요 없습니다.

어쨌든 어린아이는 진실을 말했지만, 임금님의 몸이나 재단사들의 명성과 바꾸기에는 아주 미미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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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이 곧 가치가 (그것도 상상 이상의) 되었던 지난 암호화폐 불장이 떠오르네요.... 세상에 많은 권력이 있지만 정말로 강한 힘을 가진건 숨어서 세상을 지배하는 '상징권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힘으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다만 예술품의 이야기에 한하진 않을테니까요 ^^. 가능하다면 그 카르텔에 언젠간 속하길 꿈꿔봅니다.

윗물이 아랫물을 밀어내는 순간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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