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진실은 언제나 심연 속에 있다 (1)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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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다음 영화 <기생충>(2019)


1. 진실은 언제나 심연 속에 있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일관된 특징이 있다. 사건의 핵심 혹은 영화의 주제를 담고 있는 객체나 인물이 언제나 깊은 심연 속에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 윤주(이성재)가 동네 주민의 개를 유기하는 장소도 아파트 지하실 구석의 캄캄한 수납공간 속인데, 여기서 개는 ‘연이은 개 실종사건’이라는 극의 원동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하실을 오가는 사람들과 연결되면서 인간의 양면성을 폭로하는 재료로 판도라의 상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가하면 <살인의 추억>(2003)에서는 진실의 심연이 ‘농수로’와 결말부의 ‘기차 터널’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도 진실의 실마리를 담은 시신과 인물들은 모두 깊고 어두운 심연을 헤매고 있으며, 아예 유력한 용의자이자 그 모든 진실의 의문을 품은 박현규(박해일)도 결말부엔 아예 심연의 터널로 사라지고 만다. <괴물>(2006) 역시 마찬가지다. 현서(고아성)도 깊고 어두운 한강 최심부의 어두운 공간에 빠져 사건의 동력을 제공하며,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의 원흉인 ‘포름알데히드’ 또한 하수구라는 심연으로 빠져 ‘괴물’을 낳는다는 점에서 깊은 어둠 속에 태동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잘 은유하고 있다. <마더>(2009)는 어떤가. 사건의 핵심인 ‘문아정(문희라) 살인사건’의 전말도 ‘빈 집’의 어둡고 깊은 복도 안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드러나게 될 ‘교정 불가능한’ 인간의 본성도 그 어두운 속살 속에 숨어있음이 밝혀진다. <설국열차>(2013)에 이르러서는 심연 속 진실은 아예 시각적으로 가려진 정도가 아니라 플롯이 진행되지 않으면 개방조차 되질 않는 단단한 철문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데, 물론 ‘설국열차’ 자체는 폐쇄된 공간으로 외부의 시선에서는 어두운 심연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인간 세계를 상징하는 설국열차 전체가 하나의 은폐된 진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예카트리나 브릿지 다음 묘사되는 기나긴 심연의 터널 속에서 진행되는 ‘대학살 신’은 이미지를 극중 거의 유일한 암흑 속으로 끌어들이며 ‘어둠 속의 어둠’을 구성하면서 설국열차라는 폐쇄된 세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 암막에 숨겨진 진실을 들춰낸다.

그런데 <설국열차>에서 묘사되는 심연은 적외선 영상 혹은 횃불을 들고 뛰어오는 군중들로 내막이 적나라하게 중계된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이는 봉준호 감독 스스로 “<설국열차>까지가 나의 초기작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다. … 내 초기작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봐주면 좋겠다.”라고 공언했듯, 심연 속 진실을 탐지했던 지난한 여정을 끝내고 <설국열차> 이후로는 심연 속 진실을 발견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그 진실의 구체적인 내막을 밝히려 하는 것으로 ‘어둠을 해부’하고 그 속에서 발견된 ‘진실마저도 해부’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듯하다. 실로 <설국열차>이전까지의 작품들의 심연은 영화가 끝나도 그대로 방치되지만 ‘설국열차’라는 거대한 하나의 ‘어둠 통합체’는 엔딩 시퀀스에서 파괴됨과 동시에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 속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활한 와이드 숏에 ‘파괴된 어둠의 기계’ 앞 새하얀 설원을 펼쳐 놓는다. 이는 확실히 진실이 심연의 터널 속으로 도망가던 <살인의 추억>과는 확실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 이후로는 심연 탐구에 관한 한, 새로운 세계를 선언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플란다스의 개>에서 <마더>에 이르기까지 주로 인간의 내부에 초점―인간의 육체 안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는 성격의―이 맞춰져 있었던 봉준호 감독의 심연 탐구는 <설국열차>부터 외연을 확장해 보다 넓은 세계, 사회와 국가라는 인간들의 집합체를 향한다.

<옥자>(2017)는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사유 비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사회 시스템을 주목하는 것을 넘어 생태학적 관심까지 가미된 이 영화엔 인간뿐만이 아니라 ‘슈퍼돼지’까지 주연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 속에서도 어김없이 ‘동물 실험장’으로 묘사되는 봉준호 감독의 심연은 등장하지만, 이번엔 <설국열차>에서 선언됐듯 이미 정해진 한 자리에 심연이 존재해서 수동적으로 수사되거나 탐구되는 것이 아닌, 미자(안서현)의 적극적인 수색으로 발견되는 심연이라는 점에서 전작들의 심연과 분명 차별화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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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다음 영화 <기생충>(2019)

최근의 <기생충>(2019) 역시 <옥자>와 심연 탐구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기생충>에 등장하는 심연은 ‘한 곳’이 아니라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전작과의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마치 벌레들이 어둠 곳곳에 숨어있듯, ‘기생충’으로 분한 기택(송강호) 일가는 반지하 주택으로 묘사되는 ‘어둠의 저장고’에서 비릿한 어둠의 육질로 절여져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없을 것만 같은 하늘과 맞닿은 동익(이선균)의 대저택에서도 탁월하게 어둠을 찾아낸다. 여기서 그들이 찾아내는 어둠이란, 이미지 자체의 어둠도 있지만 상류층의 어두운 면모와 허술한 마음의 틈까지 망라한다. 그리고 그 ‘탁월한 더듬이’는 마침내 동익의 저택에서 치명적인 심연을 발견하게 되는데, 앞서 <설국열차>에서 심연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태도가 바뀌었듯이 이 심연은 그저 어둠 속에 묻히지 않고 영화의 남은 절반을 함께하며 지속적으로 공개된다.

그러니 이쯤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봉준호 감독은 어째서 어두운 심연 속에서 진실을 발굴하는 방식을 고수하는 걸까. 그것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 중심적인 프레임을 살펴본다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번잡한 시장처럼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광활한 와이드 숏이나 버드 아이 뷰를 기대하기는 거의 어렵다. 설령 있다고 해도 언제나 중심엔 유의미한 비율로 ‘인간’을 반드시 세워놓는다. “프레임 속에 들어있는 피사체의 크기는 언제나 그 순간 피사체의 중요도만큼의 영역을 차지해야한다.”는 ‘히치콕의 법칙’을 상기하면 봉준호 감독이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그토록 파악하려는 진실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면 그것을 시각화하기 위해선 당연히 인체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살아있는 인간의 내부는 어떤 모습이란 말인가? 수술대에 올라가 복부를 절개하지 않은 이상 살아있는 인체의 내부는 당연히 짙은 어둠일 뿐이다. 만약 우리의 피부와 살점이 투명하다면 빛은 몸을 투과해 신체의 장기를 모두 보여줄 것이다. 허나 우리의 몸은 피부를 벗겨내도 그 속이 비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봉준호 감독이 들여다보려는 진실은 언제나 어둠속에 파묻혀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그가 영화 이미지로 치환하는 인간 내면의 진실은 늘 그 육체를 닮은 세계의 절개되지 않은 단면인 어둠의 심연 속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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