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와 네러티브의 상실
인간의 눈동자가 사물을 바라보는 경계면은 표상의 대칭 경계면이다. 물리적 시각은 공간과 시간의 영역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영역에서 무의미 단계의 1차성, 기호와 이미지들의 기표로 표류하는 2차성, 메타언어를 통해 투사된 기표들의 출력은 3차성이라 했다. 대칭성을 이루는 사물의 응시될 때는 눈동자를 통한 투사된 기표들을1차성이라 했고, 기표의 신경 전달에 따라 눈의 망막에 인식하는 것을 2차성, 현상 인식에 따른 기표만 발생하고 의미작용이 없는 무의식 단계를 3차성이라 명명했다.
여기서 인간의 의식에 따른 공간과 시간의 영역은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대칭의 경계 면에서 실제 사물과 인간의 인식 사이의 차이 발생을 설명하는 사례들로 기술의 발달로 인한 사각화된 이미지들, 영화, 사진, 텔레비전, 스마트폰, 건물, 창문, 액자 등 모든 인위적인 사물이 대상이 있다.
응시와 시선을 통한 다차원적 기호 체계의 대칭성은. 시선과 응시의 경계면을 통해 시간의 동시성과 공간의 왜곡이라는 차이가 발생한다. 3차성의 인위적 시각화와 3차성의 원형의 인식 사이의 경계 면은 차이가 발생하고 기존 기술 체계를 포괄하는 과학적 이성의 실패로 선언하였다.
The faces we see lead our gaze. Gaze plots on Doisneau's Un regard oblique
응시기계와 스마트폰
기술 발달의 최전선은 스마트폰이다. 애플의 아이폰 출시로 시작된 스마트폰은 이제 현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됐다. 경제학자들은 스마트폰의 혁신에 따른 경제 효과와 창조적 경제의 부산물에 관심을 쏟는 반면에 사회학자들은 스마트폰에 중독된 사람들을 우려의 눈길로 바라본다. 이제 스마트폰은 똑똑하고 편리한 기계를 넘어서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지배하는 새로운 인식의 도구가 됐다. 내가 다차원적 기호체계의 대칭과 차이를 제시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인식과 사고를 지배하는 새로운 도구들의 분석을 위해서이다. 가상화된 이미지들이 실제 세계에서 도구화되어 인간의 의식을 실재화 시키는 단계, 사물이지만 타자로 기능하여 주체의 대상으로 욕망을 불어 넣는 것을 ‘응시 기계’라 한다.
간단하게 시선과 응시로 도식화 한다. 사르트르의 시선 개념으로 주체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Regard한다. 주체는 스마트폰이라는 즉자 존재에 의해 주체의 객관성을 확보하지만 이는 이미지의 타자로써 시뮬라르크 되어 무화 된 주체이다. 라캉의 응시 개념으로 주체는 스마트폰 이면의 차원을 대상 a로 분리시키며 소외된 주체가 된다. 표상된 상징계에서 주체는 대상 a에 욕망하는 주체이다. 스마트폰 자체보다는 표상 너머의 대상 a에 욕망하는 주체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영원한 중독이다. 주체가 스마트폰으로부터 어떻게 시뮬라르크 되어 무화되는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중독된 욕망의 주체로 되는지 이제 다차원적 기호 체계의 대칭으로 나타낸다.
스마트폰의 가장 큰 매력은 감성적인 손끝으로의 터치를 해서 텍스트를 입력하는 것이다. 일반적 기호뿐만 아니라 감정이 은유화된 ㅋㅋ, ㅎㅎ, ㅋ, ㅎ 등의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의미는 기표 아래에 있고 은유 작용을 한다. 문자 시대의 텍스트는 다차원적 기호 체계에서 터치와 자판 입력의 경계 면을 가로지르는 인식(Recognition)에서 삼차성으로 무의식의 환유 작용(상징계를 가로지르는 환상의 횡단)이다. 환유 작용은 의식을 치환 시키고 감정을 무화시킨다. 주체는 이러한 불안으로 인해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키고 신체는, 특히 손끝은 기표들의 흐름에 따라 구멍이 발생하고 실재계에서는 행동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의식과 행동의 불일치로 인해 기표의 불연속으로 현실은 왜곡이 발생한다. 입력 행위를 하는 손과 지각을 인식하는 눈동자는 신체, 몸의 기표이기 때문에 기표가 기의를 지배한다.
공유에 의해 메시지를 작성하면 피드(Feed)에 의해 친구와 팔로워(Follower)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수신자는 SNS 접속 시점에서 피드를 받는다. 전달자 입장에서 시간은 동시적이지만, 수신자 입장에서는 접속 시점에 따라 시간은 탄력적으로 변한다. 전달자에게는 응시의 시점이 작용하고, 수신자의 시선은 정주 시간에 따라 변한다. SNS 공간은 텍스트 지배를 받는다. 사진이미지, 단문메시지, 장문메시지, 단축링크는 SNS의 가상 공간을 채우는 텍스트로써 다차원적 기호 체계의 매개 변수이다. 그리고 매개 변수들에 따라 다차원적 기호체계는 정주된 시간이라는 시차적 관점이 포함된 기호체계가 된다. 한편 본래의 원형 의식과 시각화의 표상의 차이로 인해 모바일 시대에서는 표상 가상 공간과 현실 공간이 크게 구분 짓지 못한다.
시대별로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변화
근대는 인간 주체와 주체간의 관계, 주체의 내부와 주체의 외부인 타자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철학이었다. 타자를 동일화 시키려는 주체의 폭력적 관계를 넘어서려는 포스트 모던의 탈근대는 주체와 주체, 주체와 타자의 무의식을 규명하는 철학이었다. 언어 기호학을 통한 주체, 관계, 언어의 철학이었다. 모바일 시대의 현대 철학은 이제 주체와 주체 사이에 표상된 매개체가 관계를 맺기에 주체, 관계, 언어를 넘어선 다차원적 기호체계의 철학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주체가 표상의 매개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관계인가? 여기서 표상의 매개체는 모바일 기기(Device)이다. 인간은 기술 발전에 따른 모바일 기기를 통해 응시와 시선의 다차원적 체계의 인식을 거친다. 이는 무의식으로부터 형이상학을 뛰어 넘는 초현대의 일상이다.
미래에는 다차원적 기호 체계가 점점 단순 차원으로 디지털 혁명을 일으킨다. 근대는 이성의 시대였고 탈근대는 무의식의 시대였으며 초근대의 인간은 정주(노마드)의 시대였다면 초현대의 인간은 인공(이노센트)의 시대라할 수 있다.
네러티브와 시간의 변화
초근대의 포스트 모던 영화는 이야기(네러티브)를 이미지로 대상화 시킨다. 대상화된 이미지를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한다. 관객들은 네러티브의 이미지를 보면서 실재와 가상 세계 동일화하고 향유를 즐긴다. 향유는 팔루스(남근)이고 이는 대타자이다. 이러한 네러티브의 대상화는 기표의 이미지 복제로 기표가 기의를 대체한다. 시간은 이미지들의 연속 속에서 불연속화이다. 대상화된 네러티브는 시간에 의한 적분의 팔루스로 관객들과 매개되고 적분 시점에서의 강도(Intensity)에 따라 관객은 영화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초근대의 영화들이 네러티브를 이미지로 대상화 시킨다면 초현대의 영화들은 이미지를 네러티브화 한다. 복제에 대한 복제를 통해 이야기 구조보다는 시간의 연속화에 중점을 둔다. 네러티브 구조의 배제는 팔루스가 모든 시점에서 출몰해야만 한다. 기표 공간은 팔루스에 점령당하고 대타자는 시간 속에 갇혀버린다. 이는 네러티브가 기표 공간에서 상실하는 것이다.
네러티브가 상실되면서 이미지들은 파편화되고 이는 각 분점에 의한 미분이다. 미분의 순간이 관객에게 더 중요하다. 시선의 순간은 미분의 응시로 관객에게 욕망하게 한다. 초현대의 영화가 미분의 시점에서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면, SNS는 관계의 시점,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 시간에 따라 내러티브화된 인간 관계를 관통하며 욕망을 추구한다. 욕망의 미분화, 만족의 극대화에 따라 다차원적 기호체계의 최고 단계에 이르거나 붕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