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긍정의 정신 승리법
환원주의 [reductionism]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事象)이나 개념을 단일 레벨의 더 기본적인 요소로부터 설명하려는 입장
보통 서양 철학은 탐구를 통해 절대적인 단순자를 찾으려 시도한다. 이러한 단일레벨의 기본적인 요소로 설명하려는 입장은 복합적인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발생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이러한 '환원성'의 문제를 지적한다. 언어에서 낱말의 의미가 있으려면 그 낱말의 '지시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지시대상이 없는 낱말이 없는 경우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에 빠진다. 복합적인 것을 단순하게 쪼개어 분석하여 설명하는 것이 서양의 과학 근간에 깔려있지만, '단순하다, 복합하다'는 문맥상대적인 것이지 존재에 대한 절대가 아니다. 이러한 환원주의의 근간은 유일신인 기독교로부터 기반한다. 모든 존재의 원천은 신의 창조 행위로부터 비롯됐다. 어떠한 논리보다도 앞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유일신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긍정성이 등장한다. 모든 세계의 ‘긍정성’을 신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회개로 인한 면죄, 생명의 창조 개념화 시키기, 절대진리를 가르는 규칙이 바로 신의로 귀의하는 집단 긍정성이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하나의 쉬운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것도 일종의 환원의 고리이다. 현재 어려움이 있더라도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행동은 대체적으로 긍정의 성격으로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단순한 미래 지향으로의 귀결은 자기 부정(주체의 부재로서)이다. 사건 내에서 주체는 없고, 추상적인 결과만 있다. 결국은 아무런 행동의 지향 없이 무한 긍정의 자기 합리화의 주체만 있을 것이다.
정신승리법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의 아큐의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문장에서 비롯됐다. 논쟁이나 싸움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머릿속으로만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면서 만족하는 자기위안적 행태를 일컫는다. 일종의 자기 합리화를 통한 심리학적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아큐는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서 '내가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돼먹지 않았어...'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도 만족해서 의기양양해 가버린다. 아큐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중에 하나하나 말해 버린다. 그래서 아큐를 곯려주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이러한 정신적 승리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네 까짓 것들이 다 뭐냐?' 아큐는 이러한 갖가지 묘수로 원수들을 굴복시킨 다음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서 술을 몇 잔 마시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한바탕 놀림을 당하거나, 입씨름을 하다가 또 이기고 나면, 유쾌하게 사당으로 돌아가 머리를 쑤셔 박고 자버리면 그만이다."
아큐의 정신승리법은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루쉰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각하지 못하고 자기합리화에 빠져있는 중국인의 습성을 아큐를 통해서 비판한다.
자기 긍정성을 강요하는 사회
긍정성으로 인한 주체는 타인과의 관계의 어긋남으로 부재한다. 사회는 긍정성을 각각의 구성원에게 진리처럼 환원시킨다. 이러한 자기인식의 부재는 집단합리화의 도구로 쉽게 이용될 수 있다. 주체의 부재는 곧 인식 비판의 상실이다. ‘모든 게 잘될 거야’라는 구호는 현재의 비합리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바꾸려는 행동의 실천보다는 내부에 머물러 수긍하라는 집단 체면이다. 현실을 고민을 하고, 의심을 품고, 비판의식으로 실천을 위한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진정한 긍정이다. 이러한 ‘자기 실존의 긍정성’은 철학적 범주에서 초월적 경험론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실존의 긍정성
실존에서 의식과 실재의 구조를 보면 의식은 표면을 거쳐 감각과 신체의 실재로 표상한다. 메커니즘은;
(1) 의식의 긍정, 실재(감각과 신체)의 부정
(2) 의식의 부정, 실재(감각과 신체)의 긍정
(3) 의식의 긍정, 실재(감각과 신체)의 긍정
(2)는 불안, 고민, 자기 인식의 부정으로 인한 강박증의 단계이다. 감각과 신체는 실재와 일치하지만 의식의 불안이 엄습하여 끊임없이 내부와 외부가 충돌을 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2)는 의식과 감각과 신체가 균일하게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응축과 치환으로 표면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의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어 주체가 사유를 통해 실천의 단계에 이른다. (2)의 단계에서 (3)의 단계로의 이행 과정은 자기 실존의 긍정성을 기반으로 한 사유와 실천을 통해서이다. 반면 (1)은 신경증의 단계로 내부의 생각의 과잉으로 외부와 관계가 단절되는 니힐리즘의 단계이다. 냉소의 과잉, 자기 실존의 부정으로 인해 죽은 주체가 모여 죽은 사회가 된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