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슬로우 비디오
2014, 김영탁 연출
감독은 어떤 방송에 나와 자신의 꿈이 나중에 엄청 길고 지루한 영화를 한번 찍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대중영화를 연출하는 대부분의 감독들과는 정반대의 꿈을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것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흔적이 바로 이 영화에 묻어 있다. 길고 지루함에 덧붙인 따뜻함과 함께.
여장부(차태현)은 선천적으로 과도하게 뛰어난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슬로우 비디오처럼 볼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엄청난 재능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필요이상의 동체시력 때문에 그는 달릴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자신의 첫사랑 소녀도 그런 이유로 쫓아가지 못한 채 떠나보낸다. 시간이 지나 그는 성인이 되었지만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 예민한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종일 선글라스를 끼고 집 안에서만 지내며 동네 그림을 그린다. 방에만 박혀 있지 말라는 엄마의 성화에 그는 결국 CCTV 관제센터에서 일을 하게 된다.
여장부가 마주친 CCTV라는 장치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가 가진 능력은 '잘 보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가는 모든 것들을 그는 느린 화면처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잘 보기 때문에 그는 그 속에 녹아들 수 없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첫사랑도 떠나가 버렸고 어른이 된 지금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여장부는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그들을 지켜보는 CCTV를 만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술에 취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혼자 내뱉는 사람들, 같이 해 줄 사람이 없어 어두운 밤 벽에다가 혼자 야구공을 던지는 남자,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의 기대와 설레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떤 장면 앞에서 그는 그들과 함께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첫사랑 봉수미(남상미)를 만난다.
선글라스를 끼고 이상한 말만 던지는 여장부를 봉수미는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봉수미는 어린 시절의 봉수미가 아니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 여기저기 오디션에 응모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로 빚쟁이에게 시달린다. 여장부의 기억 속 예쁜 소녀가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허덕이는 어른이 되어 있다. 그녀의 시선이 자기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지만 여장부는 여전히 그녀를 잘 보고 있다. 초반부터 암시가 되긴 하지만, 여장부는 결국 자신의 볼 수 있는 능력을 희생해가며 봉수미를 지켜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또 다시 볼 수 있는 쪽이 잊혀져 간다.
시간이 흘렀다. 봉수미와 여장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여장부가 이제는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여장부를 찾아온 봉수미는 그 때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말을 걸지 않는다. 동네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는 여장부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하루이틀, 좀더 긴 시간을 걷는다. 그녀는 그렇게 여장부가 보지 못하지만 보는 것들과 마주친다. 그리고 알게 된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