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 빌 머레이(주연)
이것은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의 이야기이다.
펜실베니아의 시골마을인 펑츄토니. 이곳은 해마다 성촉절(2월 2일)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마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못이란 동물에게 봄이 왔는지를 물어보는 행사를 연다. 기상 캐스터인 필(빌 머레이) 또한 해마다 이곳을 찾아 성촉절 행사를 취재한다. 여기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매우 시니컬하고 삐딱한 성격의 필은 매년 고향마을에 내려와 따분한 행사를 취재하는 것도 너무 싫증이 났다. 어서 빨리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필은 프로그램의 PD인 리타(앤디 맥도웰)에게도 계속 틱틱거리고 취재도 건성이다. 행사가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가려 했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폭설에 막혀 마을에 갖히고 만다. 그날 저녁 동료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바로 모텔로 돌아가 잠자리에 든다. 지긋지긋한 시골마을을 내일 아침 바로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자명종과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에 눈을 뜬 필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창문의 커튼을 펼쳤다. 눈이 전혀 쌓여있지 않았다. 모텔 안의 사람들이 어제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 그들에게 날짜를 물어봐도 모두 오늘이 2월 2일이라고 한다. 하루가 반복된 것이다. 필은 성촉절 하루를 여기서 보내고 다시 시작된 하루가 어제와 같은 날이라는 걸 깨닫는다. 필 또한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다. 행사장에 가서 취재를 하고 집에 가려했지만 다시 눈보라가 몰아친다. 모텔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그리고 눈을 뜨면 다시 시작되는 성촉절 하루.
반복되는 하루 속에 갖힌 필은 특유의 못된 장난기를 발동한다. 하루를 반복하며 처음 만난 여자의 정보를 캐내 고등학교 동창인 척 유혹하기도 하고 보험을 팔려는 옛 친구에게 틈을 보이지 않고 한방 먹이기도 한다. 은행 현금수송차량에서 돈을 빼내 비싼 술을 마시고 난폭운전을 하며 도로를 휘젓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장난과 끝나지 않는 성촉절로 지친 필은 차라리 죽어버리려고도 한다. 펑츄토니의 마스코트 마못을 납치해서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기찻길에 뛰어들거나 욕실에서 감전사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눈을 뜨면 성촉절 아침이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하루 속에서 필의 행동은 점점 변해간다. 평소에는 무시하던 카메라맨에게 커피와 간식을 챙겨주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구해주고 차가 고장나 곤란해 하던 노부부를 도와준다. 그리고 추운 밤, 길에 쓰러져 필이 경험했던 모든 성촉절 동안 계속 죽어갔던 노숙인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쓴다. '오늘만은 안돼'라는 외침과 함께. 하루가 반복되기 시작한 처음, 필이 가장 유리하게 생각했던 조건들. 어떤 악행도 결국은 리셋되어버린다는 이 하루의 조건이 지금의 필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조건이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현실. 지나가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사실은 필이 마음껏 장난을 하게 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에서도 영원히 도망가지 못하게 만든다. 얼마나 흘렀을지 모르는 시간 속에서 필은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필은 이제까지의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가기 시작한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스스로가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호의를 다하기로 한 것이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무언가를 해주고 처음엔 그저 찝적대기만 했던 리타에게도 자신의 진심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시간이라는 설정은 매우 매력적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필이 경험했듯이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절대 영원하지는 않다. 필은 하루 속에 갇혀 있다. 그에겐 수많은 하루가 남아있지만, 주어진 시간은 결국 '하루'이다. 필은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하루 속에서 어마어마한 노력을 해야 했다. 영화의 후반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필을 배려심 있고 친절한 남자라고 칭찬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했던 수많은 하루 속에서 필이 반복했던 어떤 노력의 결과였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킨 필에게 사람들은 마음을 열었고 리타 또한 그렇게 필을 받아들인 날 결국 하루가 지나갔다. 현실을 악용하거나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 중간의 어디쯤 필은 존재한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담담하게 변화시키는 남자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