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거짓이다.

in #kr6 years ago

매년 7월 14일은 프랑스 전 국민적인 축제일이다. 바로 전제청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났다고 전제청치의 이 사건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바스티유 15문의 대포가 민중을 향해 불을 뿜어 다수의 희생자가 생기고 사망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 총격이 수 시간 계속되었고 군중들이 노도처럼 밀려들어가 신음하는 죄수들을 해방하고 이들과 함께 파리 시내에서 승리의 행진을 벌였다. 이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공격자라는 칭호를 얻은 836인은 명예 연금을 지급받았다. 이 연금은 1874년까지 예산에 계산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물론 명예 연금이 지급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공격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유명한 공격자의 한 명인 에리라고 하는 왕비연대 장교는 무력으로 공격된 것이 아니라. 공격당하기 전에 항복해 버렸다고 인정하고 있다. 유란이란 스위스 국적의 사나이도 에리와 동일한 발언을 했다. 이 두 사람은 바로 바스티유에 가장 먼저 입성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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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1789년 혁명정부에서 위임받은 <바스티유 관계 문서 간행위원회>의 조사 질문을 받았던 참가자나 목격자들도 동일한 발언을 했다, 이 조사 결과는 민중의 혁명적 영웅 행위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 혁명정부의 의도와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스티유 관계 문서 간행위원회>에서 밝히려고 했던 것은 숨김없는 진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1789년 간행된 책에서 공격의 전설을 사실을 근거로 논박했던 것이다. 바스티유는 공격에 의해 점령된 것이 아니라 수비병에 의해 문이 열렸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또한 공격하려고 나섰던 것도 실제 목적은 이곳에 갇힌 죄수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화약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접한 몇몇의 무기에서 획득했던 총기에 화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릉 위해 그들은 사령관인 드로네와 수차례 교섭을 했고, 드로네는 최종적으로 전 수비대가 무사히 철수하는 것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바스티유를 인도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고 사령관과 다른 네 명의 장교, 그리고 세 명의 일반병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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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공격에 대한 진상은 직접 참가했던 사람들과 이를 조사했던 사람들에 의해 그 실상이 기록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역사적 진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성이 파괴되어 광장이 되었고 자유의 상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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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넵 감사합니다 오늘도 꾸준히 ㅎㅎ

음.... 아무래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프랑스 대혁명의 기록에도 이런 뒷얘기가 잇었네요

맞아요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다 ㅎㅎ
지금도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 즐거운 스티밋!!!

ㅎㅎ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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