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의 변화(1)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제일 좋아하는 00’에 답하는 걸 어려워 한다. 덕후 기질이 약해서 좋은 게 생겨도 그것을 깊게 파는 일이 거의 없고, 가뭄에 콩 나듯 깊게 파는 대상이 생겨도 덕질의 기간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무엇보다, 하나만 꼽기엔 세상에 괜찮은 예술과 예술가가 너무 많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답할 수 있는 ‘제일 좋아하는 00’의 ‘00’이 있는데, 영화감독이다. 벨기에 국적의 형제 영화감독, 장 삐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이들에게 팬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내일을 위한 시간>(14)이다. 이전에 내가 다르덴 형제의 전작을 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스크린을 통해 본 작품인 건 분명한데,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더니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아 심호흡을 해야 했던 강렬한 경험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후 형제의 다른 많은 작품을 보았고, 일관된 관심사와 일관된 능력으로 구축된 그들의 독보적인 연출 세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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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이번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세상을 바꾼 영화, 영화를 바꾼 세상]이라는 대주제를 갖고 영화학교를 여는데, 세 번째 강의에서 다르덴 형제를 다룬다는 걸 보았다. 최근 다르덴 형제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꺼내고 있는 이유이다. 난 그 강의를 들으러 갈 생각으로 아직 보지 않은 영화 몇 편을 챙겨 보기로 했다. (말했듯이 덕후 기질이 약한 사람이라 제일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도 아직 보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다.)

첫 번째로 선택한 영화는 가장 최근작인 <언노운 걸>(16). 다르덴 형제를 한창 좋아할 때 나온 영화이지만 개봉 당시 실망스럽다는 평이 많아 보지 않았었다. (유일하게 ‘제일 좋아하는 00’으로 답할 수 있는 존재를 잃게 되면 어떡해…) 이후 내적이든 외적이든 계기가 없어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이번이 좋은 계기가 됐다. 강의에서 최근작 얘기는 빼놓지 않을 것 같기에 <언노운 걸> 선택은 필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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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언노운 걸>)

이전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는 느낌은 확실했지만 예상 외로(?) 실망스럽지 않았다. 영화는 주인공 닥터 다뱅이 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언노운 걸’의 정체를 알기 위해 쏘다니는 과정을 따라간다. 닥터 다뱅은 평소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따뜻한 사람이고,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언노운 걸’을 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이타심이 당혹스러울 정도라고 느껴진다. 일부는 여기서부터 불편함을 느껴 이 영화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닥터 다뱅을 움직이게 한 것이 단지 이타심이나 일말의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언노운 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가 밝혀졌을 때 닥터 다뱅의 눈빛에서 경멸과 함께 안도가 느껴졌다.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게 죄책감은 죄책감이나, 미안해서 보답하려는 마음보다 자신의 죄 없음을 확인해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마음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결말에 닥터 다뱅은 자신의 죄책감을 타자에게 전이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안도감을 느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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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로나의 침묵>)

각설하고, 수강 준비를 하며 두 번째로 선택한 영화는 <로나의 침묵>(08)이었다. 끈질긴 삶의 비극만큼 끈질긴 카메라로, 행복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렵고 무거운 사람들을 비추는 다르덴 형제의 장기. 이웃을 돌아보게 하고 없던 이타심에도 불을 붙이는 다르덴 형제의 특기. 이러한 감각과 감정을 오랜만에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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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로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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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아들>)

강의는 최근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마땅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형식이 곧 메시지였던 과거의 방식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세간에 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있는데, 그 변화가 과연 꼭 나쁜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강의를 진행한 송경원 씨네21 기자는 1)다르덴 형제는 원래 메시지를 중시하는 감독이었으며 2)유럽사회 분위기가 더욱 각박해지고 있어 보다 강도 높은 방식의 프로파간다가 필요했을 거라고 그들을 옹호했다. 다만 <로제타>(99) <아들>(02)로 대표되는 초기 스타일과 <내일을 위한 시간>(14) <언노운 걸>(16)로 대표되는 최근 스타일은 방향적으로 반대 지점에 있는 게 맞기에 어떤 쪽을 선호하는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영화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결된다며, 자신의 옹호 또한 개인적인 주장임을 강조했다.

어쩌다 보니 가장 최근작이자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언노운 걸>과 시기적으로 초기 작품은 아니지만 최근 스타일보단 초기 스타일에 더 가까운 <로나의 침묵>을 보고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둘 중 어느 쪽을 선호하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영화는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싶으며 영화를 어떻게 보고 싶은가.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면 답이 나오려나. 아니, 답을 정하면 그 생각이 정립되려나? 여튼, 당분간 이에 대해 생각하려는데 좀 오래 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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