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촌
'사하촌을 읽고'
어렸을 적의 난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 집에서 놀곤 했다. 넓기만 하고 조용한 우리 집 아파트 보다는 작고 아늑한 친구들 집이 훨씬 편했다. 학교 뒤편의 골목으로 들어가다 보면 판잣집들과 반 지하에 설립된 주택들이 많았는데, 혼자 쓸쓸히 집으로 걸어가는 것보다 친구들을 따라 늦게까지 그곳에서 어울리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순수했던 것 같다. 없는 시절일수록 함께 나누고, 모두들 백 원, 이백 원 씩 모아서 초코파이 한 통을 사 먹는 것만큼 행복했던 시간은 없었다. 옆 반 현수 아주머니가 우리 어머니셨고, 짝꿍이었던 기영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셨다. 아, 물론 우리 가족이 부족했다거나 불편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의 대가족 같은, 그런 따뜻한 그들의 분위기 자체가 좋았던 것 같다.
절 아래에 한 마을이 있다. 절과 소작관계를 맺고 있는 한 농촌마을이다. 보리밥 한 그릇에 배부르고,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들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 그런 동네에 어느 날 갑자기 가뭄이 찾아온다. 가뭄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천천히, 아주 서서히 많은 것을 앗아간다. 처음엔 그 해 수확을 가져가고, 그 다음엔 할머니의 손자를 데려가고, 마지막엔 마을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의지하며 살아가던 서로를 향한 인심을 빼앗아간다. 모두가 제 살길 바쁘고 이빨을 으르렁대게 되자 마을은 조금씩 황폐화된다. 마지막엔 이런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보광사 중들을 향해 화살이 돌아가며 소설은 결말이 난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어 가며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뭄이라는 재해 앞에 무력해지는 마을 사람들. 종교를 빌미로 횡포를 부리는 중들. 각박해지는 인심 속에서 나는 느꼈다, 내 어린 시절 추억 속 동네가 허물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마음이 아팠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 사람들을, 그 마을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결국 이들의 한계를 극복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뿐이다. 서로를 돕다보면 자신이 망하게 된다. 냉혹하게, 무덤덤한 어투로 코앞에 닥친 현실을 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가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싫었다. 공부하기가 힘들고, 사는 게 외롭다며 투정부리던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에서, 절 아래의 마을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처음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그것들은 서서히 마을의 모든 것을 잠식해간다, 마치 어둠처럼. 어쩌면 그 어둠은 이미 우리 자신마저 집어 삼켰을지도 모른다. 학교라는 한계 속에서, 입시라는 경쟁 속에서 서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와중에 더욱 소중한 것들은 이미 먹혀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이 어둠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없다. 그래서 난 맘껏 발버둥 칠 생각이다. 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내 어린 시절 행복하던 그 추억을 위해, 한번 있는 힘껏 소리쳐 보고 주먹을 질러 보겠다. 결국 나를 이 현실과 한계속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일 테니까. 벌써 무너지기에는, 아직 지켜야 될 것이 너무나도 많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요즘 세상이 책속에 나오는 가뭄을 만난듯 점점 각박해져만 가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