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잊을 수 없는 일본인 스승>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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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고비고비에 훌륭한 스승님들을 만났지만 잊혀지지 않는 분이 계신다. 여학교 때 헤어지고는 다시 만나지 못한 한국을 사랑한 양심적인 일본인 스승이다.

1936년에 나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던 수송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교장은 일본인이었지만 우리나라 선생님도 절반이 넘었다.졸업하고 바로 옆의 숙명여학교에 진학하니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붉은 벽돌의 교사와 고풍스런 정취가 풍기는 담쟁이 넝쿨이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가을이면 선선한 바람과 청명한 햇살을 받고 붉게 타고 있었다.

1906년 여성교육을 위하여 고종황제 엄비는 명성학교를 설립했고 명성학교는 1909년에 숙명고등학교로 개칭되었다.
새로 부임한 일본인 노무라 교장은 엄격한 교칙으로 전시인데도 학교의 전통과 자부심에 걸맞는 명문사학의 맥을 이어나갔다. 일 학년 담임인 사우치 선생은 영어를 가르쳤는데 졸업반이었던 해방되던 해도 담임이었다. 어린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일본의 동북아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무척 개방된 교육자였다.
입학과 동시에 우리는 당시 창씨개명하라는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신문사를 그만두셔야 할 정도로 철저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지 없는 사랑을 주셨지만 내가 학교에서 당해야 하는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고집하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호출하여 교무실로 가보니 책상 위에 나의 가정환경부가 놓여 있어 겁을 먹고 서 있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웃으면서 아버지께 만나 뵙고자 한다고 전하란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라서 안팎으로 우리 집을 향한 감시에 불안했고 감당할 수 없는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와 빈번한 아버지의 출타로 어린 나는 견딜 수 없어 공부도 뒷 전이고 점점 말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서너 명 밖에 없는 대열에 끼었으나 스승님은 늘 나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채근을 하지 않고 보살펴 주셨다. 사우치 선생은 일본인의 자긍심과 나름의 애국심을 가진 분이었지만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대륙 침략 전쟁에도 공개적으로 반대는 못했지만 근심 어린 말을 해서 우리에게 다른 일본인 교사들이나 일본에 협력적인 한국인 교사들과는 다른 분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한 번은 다른 학생들 듣지 않는 곳에서 “박 선생님(나의 아버님)을 존경한다.”고 하셔서 은근히 나의 기를 세워 주셨다.

그 때 우리 학교에서는 연중행사로 학예회와 전시회가 열렸다.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대한제국 마지막 왕세자 이은 전하와 전략적 결혼으로 망국의 왕세자비가 되었던 나시모도 마사코 여사가 시어머님인 엄비가 세운 우리 학교를 방문하셨다. 나도 어려서부터 아버지께 배운 붓글씨로 전시회에 참가하였다. 당시 평민으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왕세자의 주위를 압도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시종 아름다운 미소로 우리를 대하는 우아하고 따뜻한 왕세자비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8.15 해방 후 나라 안 혼란한 정국으로 휴교령이 내려 나는 친구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에 한 달 동안 가 있었다. 돌아와 학교에 가보니 교장 선생님 이하 일본인 선생님은 떠나고 안 계셨다. 학교 기숙사에 있던 같은 반 친구는 혼란 통에 강원도 인제가 고향인데 미처 피하지 못하고 학교에남아 있어서 그 때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8월 15일 열두 시에 일본 천황의 떨리는 낮은 목소리로 항복 방송이 울려 퍼지니 노무라 교장과 일본인 선생들은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경청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 선생들은 학교 동쪽 담을 끼고 기숙사 옆 우거진 숲 속에 있던, 자신들의 천황 신을 모셨다는 봉안전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운동장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은 사 년을 다녔어도 한 번도 그 근처에 가보지 못한 신격화된 곳이었다. 운동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친구에게 담임이었던 사우치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부럽구나. 어제의 나의 인생관이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는 뒷모습이 땀에 흠뻑 젖은 와이셔츠 바람으로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일수교 후 일본에 가는 길에 어렵게 수소문하여 몇몇 동창들이 선생님을 만났는데 제자들이 모시고 한국을 다녀가시도록 권하였더니 “침략국민인 내가 무슨 낯으로 제자들을 만나겠느냐”고 극구 사양하여 한국의 제자들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다. 더욱이 내가 일본을 다니러 갔을 때는 한참 후여서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에 우리의 수백만 명의 인생을 짓밟은 징병, 징용, 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하여 눈감았으며, 역사적인 고증이 있는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스승님같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고, 종교계에서도 사죄와 화해의 손길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 번 큐슈지역에서 만난 여러 교수님들과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의 회원들의 한국 시 연구 등 일각에서 일어나는 문화교류를 보았다. 이런 분들이 있어 아픈 기억을 거울 삼아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역사의 반성과 함께 미래 양국의 우호관계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지하에 계시는 스승님도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이런 일을 도와 주시리라 믿는다.
진정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으로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않게 되는 그런 스승님들이 역사를 바르게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되는 한일 관계가 되길 희망한다.

                                                        2011. 11. 14        

하루 1수필인데 올린지가 꽤 되었네요. 꾸준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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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십니다.
선생님~`..
높으신 연세 같은데..
지금도 글을 쓰시고 ...
잊지 못할 스승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것 같아요
좋은 글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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