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맞선다고 할 때, 맞서는 그 대상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번이라도 전기를 써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의지가 맞서는 그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남빛의 바다를 하얀 물보라로 바꾸는 뱃길 주변에서는 아무리 해도 당장 대양의 권태로운 푸른빛이 보이지 않듯이 인간의 의지 역시 삶의 여러 굴곡 중 하나일지 모른다. 때로 파도가 치고 남빛 대양의 한켠이 하얀 물보라로 부서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운명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뿐이다. 운명은 논리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맞서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한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준다. 씨앗이며 고목을, 꽃이며 과실을, 새순이며 낙엽을, 탄생이며 죽음을. 그 속에 인간의 보잘것없는 의지까지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김연수 / 꾿빠이, 이상' 중에서
-------------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비굴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의지는, 자아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어버리거나 늙어 기억을 망실하는 꼴을 수없이 보아왔으면서도 우리는 어찌 그리도 자아를 애정하는지, 어리석고 어리석다. 남은 것은 오로지 운명, 숙명 뿐이다. 거기에 보잘것없는 의지까지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