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3)

in #kr7 years ago (edited)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3)

사실 누미토르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 분노한 로물루스가 아물리우스의 왕궁에 이미 육박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물리우스의 학정과 폭압에 시달려온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로물루스는 무리를 1백 명 단위로 조직된 백인대로 나누어 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미리 성 안에 잠입해 있던 레무스는 특유의 거침없는 달변으로 시민들을 선동해 소요를 일으켰다. 대비할 태세도 미처 갖추지 못한 채 안팎으로 공격을 받은 아물리우스는 변변한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서 무기력하게 잡혀죽고 말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우연과 행운으로 점철된 설화에 가까운 이 일화에 대해서 건국 초기에 놀라운 기적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로마가 이후에 강대한 제국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 신빙성과 진실성을 인정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할아버지 밑에서 편하게 왕국을 상속받기를 바랐으련만 형제는 가족의 원수를 갚은 다음 조부에게는 온전한 나라의 지배권을, 어머니에게는 자유와 명예를 찾아준 데 만족하고는 미련 없이 알바 왕국을 떠났다. 그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젖을 먹은 곳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으리라. 누미토르에게는 강제로 사제가 된 딸 말고도 다른 자식들이 여러 명 있었을 테고,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삼촌이나 사촌들과 경쟁해 왕국을 물려받기보다는 새 나라를 일구는 편이 차라리 더 낫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후대인이 보기에는 현명하고 위대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대담하면서도 어찌 보면 굉장히 무모한 발상이었다.

두 사람이 자립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이보다 더 크고 본질적 이유가 있었다. 기록에는 소수의 결단과 기획에 의해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으로 묘사됐지만, 아물리우스 타도에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으리라. 구질서의 옹호자이자 대표자였을 아물리우스 정권을 쓰러뜨리는 일에는 여느 반란이나 혁명에서처럼 노예와 도망자 같은 사회적으로 불우하고 소외된 집단 역시 다수 참여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이들 하층계급의 장래 거취가 첨예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해산시키자니 거센 반발이 예상됐고, 그대로 거느리고 있자니 누미토르의 의심을 살 것이 명백했다. 누미토르의 희망사항은 아물리우스의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는 것뿐이지, 그 이상의 근본적 체제변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알바의 기존 거주민들이 형제의 휘하에 모여든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온건한 부르주아 계급이라고 할 알바 왕국의 토착민들은 급진적 이주 노동자들로 볼 수 있는 한때의 혁명동지들과의 결합은 고사하고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 인정조차 해주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따라서 자칫하다가는 혁명에 뒤따르기 쉬운 격렬한 내전에 휩싸일 판이었다.

형제는 내전으로 이어질 폭력적 계급혁명 대신 이주를 선택했다. 그러나 내전의 유령은 그들을 끈덕지게 따라와 로물루스와 레무스 사이에서 으스스한 자태를 드러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사이의 싸움은 어디에다 새로운 도시를 세울 것이냐를 둘러싸고 촉발됐다. 후세의 우리는 그깟 시가지 위치 때문에 골육상쟁을 벌이느냐고 혀를 끌끌 차겠지만, 21세기의 한국에서 수도의 입지를 둘러싸고 헌법재판소에서 느닷없이 ‘관습헌법’까지 튀어나온 것을 보면 우리가 고대의 로마인들을 마냥 마음 편히 놀려댈 처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형은 평지에 도시를 세우기 바랐고, 동생은 언덕 위에 새로운 나라의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다가올 권력투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자신의 지지층이 선호할 법한 자리를 고집했다. 두 사람은 더 많은 독수리가 날아오는 쪽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합의한 다음 경쟁에 들어갔다. 로물루스에게는 열두 마리의 독수리가 찾아왔고, 레무스에게는 여섯 마리의 독수리가 날아왔으므로 형의 의견대로 평지에 도시를 조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일을 계기로 독수리는 로마에서 그 비행을 보고 점을 칠 만큼 신성한 새로 여겨지게 됐다.

공존과 상생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로물루스가 일종의 분식회계를 자행했음이 이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독수리의 숫자를 거짓으로 셌다. 격분한 레무스는 로물루스의 성벽 축조 작업을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방해다가가 로물루스의 심복인 켈레르에게 맞아죽었다. 일설에는 로물루스가 동생을 직접 살해했다고 한다. 필자는 성벽 근처에서 양측 병력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로물루스가 전투 중에 죽거나 싸움에서 패배해 처형당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때 죽임을 당한 사망자들의 명단에는 쌍둥이 형제의 의붓아버지인 파우스툴루스와 그의 동생인 플레이스티누스도 들어 있었다. 플레이티누스는 형이 쌍둥이들을 양육하는 일을 세심하게 도왔던 터였다. 개국공신의 상당수가 대거 죽어나갔으니, 건국기의 조선 왕조를 핏빛으로 붉게 물들인 왕자의 난에 버금갈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로물루스는 레무스와 두 양부를 레모니아에 성대하게 장사지냈다.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기 위한 화해의 몸짓이자, 이제 나라의 모든 권력이 로물루스 1인에게 확고하게 집중됐음을 알리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장례가 끝나자 그는 도시의 건설을 재개했다.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하드웨어 역할을 해줄 여러 가지 선진적 법률과 제도와 절차와 의례들을 에트루리아 사람들을 초빙해 전수받았다. 로물루스 또한 테세우스와 마찬가지로 문호개방을 국시로 삼았다.

로물루스가 동생인 레무스를 살해하기에 이른
로마판 왕자의 난은 단순한 권력투쟁의 차원을 뛰어넘어
국가체제의 근본적 성격을 둘러싼 격렬한 노선투쟁의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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