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1)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사실상 ‘카이사르 이야기’였다.
카이사르(BC 100년~BC 44년)는 술라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는 한때 독재자로 군림했던 킨나의 딸이었다. 술라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카이사르를 을러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미래의 로마제정의 창시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술라는 코르넬리아가 카이사르에게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을 압수하는 것 외에는 달리 화풀이할 방법이 없었다. 이 금슬 좋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훗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내가 된다.
카이사르 쪽에서도 술라를 혐오할 이유가 충분했다. 술라와는 앙숙지간이었던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고모부였기 때문이다. 술라와의 내전에서 패배해 자살한 마리우스 2세는 카이사르의 고모인 율리아의 아들이었다.
술라는 카이사르를 애송이 취급했다. 인간백정과 다름없던 술라 정권 치하에서 카이사르가 숙청의 광풍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다행으로 여겼을 이러한 상황을 카이사르는 되레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거물로 대접받기를 원했다.
그런 카이사르의 진가를 술라는 마침내 인정했다. 그는 “카이사르라는 어린애 안에는 수십 명의 마리우스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마리우스의 이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카이사르는 즉시 안전한 곳으로 은신했다. 그는 분명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로 로마 시내를 떠났을 듯하다.
안전한 망명지를 구해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왕에게까지 갔던 카이사르는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도중 해적들에게 납치당했다. 해적들이 몸값으로 20탈란톤을 요구하자 카이사르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불쾌해하면서 50탈란톤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인질범처럼 행동하는 인질이었다. 해적들과 어울려 운동과 놀이에 열중하기는 예사였고, 심지어 밤늦게 떠드는 그들을 향해 “잠 좀 자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가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경고하자 바다의 무법자들은 카이사르가 아직 철이 없는 탓이라며 웃어넘겼다.
해적들은 카이사르에게 당한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몸값을 주고 풀려난 카이사르가 선박에 병사들을 태우고 해적들의 소굴을 급습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일망타진된 해적들을 페르가몬으로 끌고 가 죄다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해적들의 수중에 있던 장물들은 카이사르의 전리품이 되었다.
권불십년이라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술라의 절대 권력에도 황혼이 찾아왔다. 술라의 황혼은 카이사르의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준비된 영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변설의 힘은 로마 정치의 중요한 구성요소의 하나였다. 카이사르는 로도스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키케로의 스승이기도 했던 명망 높은 연설가 아폴로니오스가 살았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두 번째 가는 연설가라는 평가를 들을 때가지 웅변 연습에 몰두했다. 하지만 첫 번째 연설가의 자리는 키케로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그는 연설에서가 아니라 전쟁과 정치에서 최고가 되길 바랐다.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사실상 ‘카이사르 이야기’였다.
카이사르(BC 100년~BC 44년)는 술라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는 한때 독재자로 군림했던 킨나의 딸이었다. 술라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카이사르를 을러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미래의 로마제정의 창시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술라는 코르넬리아가 카이사르에게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을 압수하는 것 외에는 달리 화풀이할 방법이 없었다. 이 금슬 좋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훗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내가 된다.
카이사르 쪽에서도 술라를 혐오할 이유가 충분했다. 술라와는 앙숙지간이었던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고모부였기 때문이다. 술라와의 내전에서 패배해 자살한 마리우스 2세는 카이사르의 고모인 율리아의 아들이었다.
술라는 카이사르를 애송이 취급했다. 인간백정과 다름없던 술라 정권 치하에서 카이사르가 숙청의 광풍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다행으로 여겼을 이러한 상황을 카이사르는 되레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거물로 대접받기를 원했다.
그런 카이사르의 진가를 술라는 마침내 인정했다. 그는 “카이사르라는 어린애 안에는 수십 명의 마리우스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마리우스의 이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카이사르는 즉시 안전한 곳으로 은신했다. 그는 분명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로 로마 시내를 떠났을 듯하다.
안전한 망명지를 구해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왕에게까지 갔던 카이사르는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도중 해적들에게 납치당했다. 해적들이 몸값으로 20탈란톤을 요구하자 카이사르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불쾌해하면서 50탈란톤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인질범처럼 행동하는 인질이었다. 해적들과 어울려 운동과 놀이에 열중하기는 예사였고, 심지어 밤늦게 떠드는 그들을 향해 “잠 좀 자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가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경고하자 바다의 무법자들은 카이사르가 아직 철이 없는 탓이라며 웃어넘겼다.
해적들은 카이사르에게 당한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몸값을 주고 풀려난 카이사르가 선박에 병사들을 태우고 해적들의 소굴을 급습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일망타진된 해적들을 페르가몬으로 끌고 가 죄다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해적들의 수중에 있던 장물들은 카이사르의 전리품이 되었다.
권불십년이라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술라의 절대 권력에도 황혼이 찾아왔다. 술라의 황혼은 카이사르의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준비된 영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변설의 힘은 로마 정치의 중요한 구성요소의 하나였다. 카이사르는 로도스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키케로의 스승이기도 했던 명망 높은 연설가 아폴로니오스가 살았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두 번째 가는 연설가라는 평가를 들을 때가지 웅변 연습에 몰두했다. 하지만 첫 번째 연설가의 자리는 키케로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그는 연설에서가 아니라 전쟁과 정치에서 최고가 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