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6)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6)
권력과 돈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이명박과 페리클레스는 극과 극을 달렸다.
아테네는 고대 세계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대한 제국이었다. 따라서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아테네 영토 안으로 모여들었다. 페리클레스는 유능한 의사가 온갖 질병들에 대해서 그에 걸맞은 처방을 일일이 내리듯이, 다양함을 넘어 잡다하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 아테네의 수많은 사회계층들에게 각기 알맞은 정책을 제시했다.
정책 없는 정치는 공허하고, 정치 없는 정책은 맹목적인 법이다. 페리클레스는 나날이 원숙해지는 탁월한 수사학으로 민중의 울분을 진정시키고, 대중의 좌절감을 가라앉혔다. 플라톤은 수사학의 임무는 영혼이라는 악기의 현을 능숙하게 튕기며 인간의 감정과 열망을 다스리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에서 페리클레스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페리클레스의 말발이 잘 통했던 중요한 이유는 그가 언행이 일치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랜 정적인 투키디데스조차 페리클레스의 성공이 그의 고결한 품성과 올바른 몸가짐에 크게 힘입었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페리클레스는 외국의 군주들로부터도 신뢰를 받았다. 실제로 몇몇 국왕과 참주들은 페리클레스를 자식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페리클레스는 유력한 통치자들과의 폭넓은 교유와 돈독한 친분을 오직 공익을 증진하는 목적으로만 선용했다. 위대한 아테네를 더 위대하게 만들었던 이 사나이는 그가 장악한 권력을 부유한 자신을 더 부유하게 하는 데 악용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 작게는 페리클레스의, 크게는 아테네의 치명적 한계가 있었다. 로마의 번영이 시스템의 힘으로 이뤄졌다면, 아테네의 번성은 페리클레스 한 사람의 덕성과 역량에 너무나 크게 의존했던 탓이다. 조직력의 원 팀(One Team)과 개인기의 원맨 팀(One-man Team) 중에서 어느 쪽이 더욱 지속가능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물어보나 마나이리라.
페리클레스는 투키디데스를 비롯한 쟁쟁한 경쟁자들의 도전을 뿌리치고 무려 40년간 권좌에 머물렀다. 그는 해마다 사령관직에 재임명되는 방식으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몇몇 희극작가들은 페리클레스와 그 동료들을 ‘새로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며 장기집권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페리클레스가 오랜 통치기간 동안 뇌물과 관련된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무색해졌다.
페리클레스는 재산증식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허투루 낭비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인인 에반겔로스를 대리인으로 앉힌 다음 집안의 지출과 소비를 꼼꼼히 통제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페리클레스의 부인과 자식들은 최고 권력자의 가족에 어울리지 않는 혹독한 내핍생활을 견뎌야 했다.
페리클레스의 스승인 아낙사고라스는 집을 버리는 것에 더하여 농사까지 포기한 탓에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늙고 쇠약해진 아낙사고라스가 병상에 드러누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페리클레스는 옛 스승을 찾아가 나랏일을 조언해줄 사람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데 따른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자 아낙사고라스는 두통을 완화하기 위해 두르고 있던 머리띠를 풀면서 “여보게, 지혜의 등불이 필요하다면 먼저 등잔에 기름부터 부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제자에 대한 서운함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이 구슬픈 일화가 웅변하는 것처럼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주변을 매정할 만큼 철저하게 관리했다.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6)
권력과 돈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이명박과 페리클레스는 극과 극을 달렸다.
아테네는 고대 세계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대한 제국이었다. 따라서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아테네 영토 안으로 모여들었다. 페리클레스는 유능한 의사가 온갖 질병들에 대해서 그에 걸맞은 처방을 일일이 내리듯이, 다양함을 넘어 잡다하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 아테네의 수많은 사회계층들에게 각기 알맞은 정책을 제시했다.
정책 없는 정치는 공허하고, 정치 없는 정책은 맹목적인 법이다. 페리클레스는 나날이 원숙해지는 탁월한 수사학으로 민중의 울분을 진정시키고, 대중의 좌절감을 가라앉혔다. 플라톤은 수사학의 임무는 영혼이라는 악기의 현을 능숙하게 튕기며 인간의 감정과 열망을 다스리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에서 페리클레스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페리클레스의 말발이 잘 통했던 중요한 이유는 그가 언행이 일치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랜 정적인 투키디데스조차 페리클레스의 성공이 그의 고결한 품성과 올바른 몸가짐에 크게 힘입었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페리클레스는 외국의 군주들로부터도 신뢰를 받았다. 실제로 몇몇 국왕과 참주들은 페리클레스를 자식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페리클레스는 유력한 통치자들과의 폭넓은 교유와 돈독한 친분을 오직 공익을 증진하는 목적으로만 선용했다. 위대한 아테네를 더 위대하게 만들었던 이 사나이는 그가 장악한 권력을 부유한 자신을 더 부유하게 하는 데 악용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 작게는 페리클레스의, 크게는 아테네의 치명적 한계가 있었다. 로마의 번영이 시스템의 힘으로 이뤄졌다면, 아테네의 번성은 페리클레스 한 사람의 덕성과 역량에 너무나 크게 의존했던 탓이다. 조직력의 원 팀(One Team)과 개인기의 원맨 팀(One-man Team) 중에서 어느 쪽이 더욱 지속가능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물어보나 마나이리라.
페리클레스는 투키디데스를 비롯한 쟁쟁한 경쟁자들의 도전을 뿌리치고 무려 40년간 권좌에 머물렀다. 그는 해마다 사령관직에 재임명되는 방식으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몇몇 희극작가들은 페리클레스와 그 동료들을 ‘새로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며 장기집권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페리클레스가 오랜 통치기간 동안 뇌물과 관련된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무색해졌다.
페리클레스는 재산증식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허투루 낭비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인인 에반겔로스를 대리인으로 앉힌 다음 집안의 지출과 소비를 꼼꼼히 통제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페리클레스의 부인과 자식들은 최고 권력자의 가족에 어울리지 않는 혹독한 내핍생활을 견뎌야 했다.
페리클레스의 스승인 아낙사고라스는 집을 버리는 것에 더하여 농사까지 포기한 탓에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늙고 쇠약해진 아낙사고라스가 병상에 드러누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페리클레스는 옛 스승을 찾아가 나랏일을 조언해줄 사람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데 따른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자 아낙사고라스는 두통을 완화하기 위해 두르고 있던 머리띠를 풀면서 “여보게, 지혜의 등불이 필요하다면 먼저 등잔에 기름부터 부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제자에 대한 서운함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이 구슬픈 일화가 웅변하는 것처럼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주변을 매정할 만큼 철저하게 관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