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13)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13)
카밀루스는 젊은 도전자의 위선적인 ‘내로남불’ 행동 덕분에
심각한 정치적 궁지에서 또다시 가까스로 탈출할 수가 있었다.
카밀루스는 대중의 소요를 가라앉히고자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는 회의장도 옮겨 보고, 세금폭탄도 써봤다. 호민관들은 카밀루스가 시민들의 정당한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려는 행동을 계속하면 그에게 5만 드라크마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역공을 가했다. 카밀루스는 또다시 로마에서 쫓겨나고 싶지는 않았다. 유배 생활은 악몽과도 같았다. 그는 와병을 구실로 관직에서 내려왔다.
후임 독재관은 스톨로를 기병대장에 앉혔다. 그리고 특정한 개인이 5백 유게룸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끔 금지하는 법안을 원로원에서 통과시켰다. 법안을 제안한 스톨로에게는 커다란 정치적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3일 천하가 되고 말았다. 스톨로 스스로가 엄청난 땅부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톨로는 어쩔 수 없이 벌금을 내야 했고, 이 일로 그의 정치생명은 사실상 끝났다.
스톨로는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집정관 구성 문제는 로마 정계의 뜨거운 감자로 여전히 남았다. 이때 갈리아인들이 아드리아 해에 배를 타고 나타났다.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그들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해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목숨을 보전해야만 했다.
갈리아 족은 전쟁과 더불어 국론통일을 로마에 가져왔다. 부자와 가난뱅이, 원로원 의원들과 평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민족의 외침에 맞섰다. 카밀루스는 생애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독재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이미 여든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였다. 그럼에도 고사도 하지 않고, 조건도 달지 않은 채 독재관 자리를 흔쾌히 수락하고는 군대의 지휘봉을 잡았다.
카밀루스는 갈리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십분 활용해 로마군의 무기 개량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새로운 무쇠투구를 제작해 갈리아족의 칼로부터 아군 병사들의 머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가장자리에 청동으로 된 테를 두르게 함으로써 방패의 방호력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갈리아 군대는 아니오 강가에 진영을 설치했다. 그들은 약탈한 물건들 때문에 군대의 생명이라고 할 기동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였다. 카밀루스는 완만한 비탈의 경사지에 주력을 배치하고는 일부 병사들을 갈리아족들을 유인하는 미끼로 내보냈다.
이 당시의 갈리아 군대에는 과거의 브렌누스 같은 지략가가 없었던지 그들은 카밀루스가 놓은 덫에 대뜸 걸려들었다. 카밀루스는 사냥감이 올가미에 걸려들자 로마군 전력의 중핵인 기병대와 중장보병들을 매복해 있던 숲속에서 차례로 출격시켰다. 갈리아인들은 사납게 칼을 휘두르고, 수없이 창을 던졌지만 로마군의 성능이 개선된 투구와 방패 앞에서는 무용지물과 다름없었다. 대열이 무너진 갈리아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군에게 얼마 못가 덜미가 따라잡혀 대부분 무참하게 도륙을 당했다.
☞ 주 : 1 유게룸은 0.252 헥타르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13)
심각한 정치적 궁지에서 또다시 가까스로 탈출할 수가 있었다.
카밀루스는 대중의 소요를 가라앉히고자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는 회의장도 옮겨 보고, 세금폭탄도 써봤다. 호민관들은 카밀루스가 시민들의 정당한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려는 행동을 계속하면 그에게 5만 드라크마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역공을 가했다. 카밀루스는 또다시 로마에서 쫓겨나고 싶지는 않았다. 유배 생활은 악몽과도 같았다. 그는 와병을 구실로 관직에서 내려왔다.
후임 독재관은 스톨로를 기병대장에 앉혔다. 그리고 특정한 개인이 5백 유게룸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끔 금지하는 법안을 원로원에서 통과시켰다. 법안을 제안한 스톨로에게는 커다란 정치적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3일 천하가 되고 말았다. 스톨로 스스로가 엄청난 땅부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톨로는 어쩔 수 없이 벌금을 내야 했고, 이 일로 그의 정치생명은 사실상 끝났다.
스톨로는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집정관 구성 문제는 로마 정계의 뜨거운 감자로 여전히 남았다. 이때 갈리아인들이 아드리아 해에 배를 타고 나타났다.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그들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해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목숨을 보전해야만 했다.
갈리아 족은 전쟁과 더불어 국론통일을 로마에 가져왔다. 부자와 가난뱅이, 원로원 의원들과 평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민족의 외침에 맞섰다. 카밀루스는 생애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독재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이미 여든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였다. 그럼에도 고사도 하지 않고, 조건도 달지 않은 채 독재관 자리를 흔쾌히 수락하고는 군대의 지휘봉을 잡았다.
카밀루스는 갈리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십분 활용해 로마군의 무기 개량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새로운 무쇠투구를 제작해 갈리아족의 칼로부터 아군 병사들의 머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가장자리에 청동으로 된 테를 두르게 함으로써 방패의 방호력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갈리아 군대는 아니오 강가에 진영을 설치했다. 그들은 약탈한 물건들 때문에 군대의 생명이라고 할 기동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였다. 카밀루스는 완만한 비탈의 경사지에 주력을 배치하고는 일부 병사들을 갈리아족들을 유인하는 미끼로 내보냈다.
이 당시의 갈리아 군대에는 과거의 브렌누스 같은 지략가가 없었던지 그들은 카밀루스가 놓은 덫에 대뜸 걸려들었다. 카밀루스는 사냥감이 올가미에 걸려들자 로마군 전력의 중핵인 기병대와 중장보병들을 매복해 있던 숲속에서 차례로 출격시켰다. 갈리아인들은 사납게 칼을 휘두르고, 수없이 창을 던졌지만 로마군의 성능이 개선된 투구와 방패 앞에서는 무용지물과 다름없었다. 대열이 무너진 갈리아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군에게 얼마 못가 덜미가 따라잡혀 대부분 무참하게 도륙을 당했다.
☞ 주 : 1 유게룸은 0.252 헥타르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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