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 에세이를 쏟았다.

in #kr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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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동안 끝이 보이지 않던 작업을 겨우 마치고 시간을 보니 오후 2시 42분이었다. 서둘러 컴퓨터를 켰고, 파리 시각으로 오전 11시 15분부터 시작된 개표 현황은 모니터 속 아나운서들의 떨리는 목소리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통계는 한눈에 봐도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들리는 목소리들에 집중하며 설거지를 후다닥 마쳤다. 평소 TV를 틀어놓지 않는 방에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 차니, 이내 머지않아 급속도로 머리가 아파졌다. 급히 화장실에 구비해놓은 애드빌을 찾았다. 곧 월경 주간이기도 했고, 며칠째 한 곡과 벌이던 씨름을 끝냈으니 두통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까.


 한 알을 입안에 털어놓고 나서 시간을 보니 3시 12분. 어제 하루는 책을 읽지 못했기에 오늘은 밀려있는 독서 리스트 중 한 권을 시작해야 했다. 아직은 일교차가 큰, 쌀쌀한 바람이 창문가를 넘나드는 날씨다. 피곤했지만 독서를 시작할 요량으로 살짝 기댄 틈으로 친절한 바람이 노크할 수 있도록 창을 열어두었다. 묵직한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 패드를 집어 들었다. 불현듯, 이대로는 서늘한 마루의 온도가 독서를 방해할 거란 직감이 들어 다시 일어나 발치의 1인용 전기장판을 켰다. 지난겨울을 나게 해준 고마운 물건이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긴장의 끈이 풀린 탓도 있겠지만, 등은 따습고 이마엔 바람이 살랑이니 이내 슬슬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대충 보이는 개표 결과에 더 이상의 안테나를 세우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품을 들였던 솔로 transcription 은 끝이 났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초조했다. 잠도 깰겸, 어제 사두었던 브리오슈를 살짝 굽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우유를 꺼냈다. 냉장고 문을 닫는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훅 느껴지는 찬기에 발가락이 놀란 듯 꿈틀거린다. 늘 타자와 피아노를 치는 손에 시선을 두었던 나는 요새, 이유 없이 짧고 뭉툭한 발끝을 응시하게 되었다. 왜일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푹 가라앉은 도시의 공기가 더욱 선명해졌다. 앞으로 4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될까. 놓지 못한 생각의 끈들이 고리를 만드는 동안 브리오슈 한입, 우유 한 모금. 줄어들고 늘어나는 개표율을 흘끔, 피아노 위에 쌓인 먼지를 흘끔. 이렇게 또 4월의 반 토막이 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 49분이다.


 COVID-19 바이러스가 아무리 답답한 일상을 초래했다고 해도 밤낮으로 고생하는 의료진, 공공기관의 소식을 듣다 보면 불편한 일상을 겪는 나의 감정들은 무수히 가라앉는다. 방에 앉아 가만히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초조하다. 전국적 이동 제한 조치가 이루어진 프랑스, 비효율적인 의료시스템으로 최악의 셧다운을 겪고 있는 미국, 신규 확진자는 줄고 있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이른 한국.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견딘지 벌써 80일 남짓이란 시간이 지났다. 프랑스 한국 대사관에 따르면 파스퇴르 연구소는 프랑스 내 코로나19가 4월 말에 정점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전하며, 5월 중순, 또는 6월까지도 사태가 지속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감역 확산 추세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은 어려우나, 그동안 상황을 통해 전문가들이 내놓은 연구결과와 통계와 질문들이 주목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다.


 매일 저녁 8시가 되면 업데이트되는 코로나 바이러스 세계 현황을 온라인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오늘, 프랑스엔 1천4백 명의 사망자 숫자가 찍혔다. 각국의 숫자들을 쭉 훑어보다 한국에서 멈칫한 나는 또 책상 밑의 발을 들여다본다. 일상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 또는 개인으로서 이번 코로나19란 어떤 의미였을까. 흩어져 있던 시선을 한 데 모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사건이 아니었을까. 나 또한 지난 시간 동안 영위하는 삶에, 행하는 교육에, 글에, 음악에 여러 의미를 되돌아보게 된 시간을 거쳤다. 그중 단연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공동체, 바로 이웃에 대한 필요성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개입되어 무언가를 '같이' 행함으로써 얻는 것들의 소중함. 넓은 세상 속,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진즉 알았지만 지금처럼 절실히 느껴본 적은 없었다. 소규모로는 가족, 또는 친구 크게는 학교, 회사 등 단체에서 사람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유의미한 소통을 가지는 것, 즉 나와 다른 타인과 연결됨으로써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느끼게 된 것이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통계로 보이는 바이러스의 공포에 맞서 나와 내 이웃을 지키는데 가장 큰 공조를 한 배경엔 사실, 대단한 인류애가 필요치 않았다. 각종 뉴스와 미디어 매개체에서 이의 중요성과 실천 방법 또는 제도를 만들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대충 알기도 했지만, 실상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걸릴 수 있는 확률과 내가 내 주변인에게 퍼트릴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고, 재난 또는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을 세상 사람들 모두 품고 있다면, 결국 우리는 한마음일 테니까. 우린 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Cosmopolitanism and Religion'의 강남순 저자는 "'나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나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지닌 무수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키워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나 자신이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무수한 타자들 속에서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의 소중함, 존엄성, 권리, 그리고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너' 속의 이 사실들 역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책에서 야기하는 '이웃사랑'에 대한 진정한 담론과 실천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공부하며 실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이웃사랑의 의미 그리고 필요성을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들 그리고 개인, 국가적으로 모두가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옅게나마 느끼는 중이다. 물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정치적 이야기들을 접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조금 버겁기도 하지만, 한 시민으로서 인지하고 있어야 할 사항이라 생각해 평소보다 더욱 자주 모니터를 켜두고 있다. 컴퓨터속 시계침이 가리키는 시간, 5시 12분.


 2020년 4월 16일 여성신문에 실린 "코로나, '뉴 노말'시대 연다" 기사에서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개학이 미뤄지고, 온라인 강의가 시작되면서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공간이고, 교육은 무엇인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나온다고 말했다. 전 세계를 강타해 안온한 일상을 뺏어간 바이러스는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중장기전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에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쏘아 올려진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이러한 질문들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일까.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저녁준비를 할 시간이었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물론, 지금 책상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잠에 들기 전까지 무의미한 시간과 싸우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글을 쓰고 공부하는 것만큼 균형있는 음식 섭취를 하는 일은 중요하다. 만약 끼니를 계속 거르는 모습을 부모님이 본다면 안그래도 걱정 끼치는 큰딸한테 얼마나 더 근심을 지으실지 안봐도 뻔한 일.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소박하게라도 차려먹기로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메일 수신함을 열어보지만 기다리는 메일은 오지 않고, 미련 가득한 눈길을 마침내 치우고선 일어서서 저녁을 지으러 간다. 우유를 끓이고 식초에 응고를 시켜 만들어놓은 홈메이드 리코타 치즈에 작은 빵, 그리고 샐러드를 곁들였다. 여기에 견과류만 넣으면 딱일텐데 아쉬워하며 한 숟갈을 뜬다. 전에 몽마르뜨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메뉴를 잊지 못해 사진첩을 뒤적였다. 언제 갔었더라... 하고.


 글이 써지지 않는 밤이면 집 앞으로 나가 센 강 둔치에 서서 바라본다. 겨울에는 강 바람을 온 몸으로 맞는, 여름엔 강의 눅진한 습기를 빨아들이는 도로 20m 앞에 위치한 우리집의 장점, 훤한 센 강 풍경. 위로가 되지도 그렇다고 근심걱정을 덜어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지난 시간동안 노력한 결과 중 하나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수 있다. 시간은 저녁 11시. 에펠탑이 조명을 비춘다. 매 정각 5분동안 라이트쇼를 하는데, 맞춰 나오지 않아도 우연히 반짝이는 탑을 발견하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다보니 시간메 맞춰 나와 샌들을 신은 발가락 끝을, 반짝이는 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시간이 문득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5분이 꽤나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왜 몰랐을까. 5분이란 참 무수한 일이 일어나는 긴 시간이라는 것을. 발이 빛나는 건지, 탑이 가지런한 건지 헷갈릴 때면 다시 집으로 올라 온다.


 버거운 엔딩은 늘 고민거리다. 글을 쓰는 동료들이 호소하는 어려움 중 하나인 이 '마무리'는 뻔한 서사의 끝으로 계속 몰아가려는 의지를 의식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나 또한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이럴때면 어디선가 읽은, 익숙한 방법으로 쉽게 닫지 말고 차라리 마침표를 열어두는 방법도 괜찮다는 문구를 떠올린다. 하루종일 쓰고, 읽고, 노래하고, 먹고, 자고 반복의 기록인 하루치 에세이는 아무리 잘 써도 완벽히 마무리 될 리 없다. 그저 온전하게 살아낸 일상이면 되었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마음에 남은 반짝임이 내 발 끝에 잘 머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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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게 흘러가는 하루네요 탈고 축하해요

앗, raah 님 오랜만이에요. 응원 감사합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일년 넘게 다른 호흡으로 탈고를 기다리는 글들이 많아 부지런히 끝내야 하는데 말이죠. ㅎㅎ 건강한 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래일라님,

어렵고 힘든 시기 잘 견뎌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탈고 축하드립니다.

파리푸드헌터님도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쏟았다기엔 그 하루치 반짝임이 눈부실 정도네요. ^^

그 표현을 잡아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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