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스무 살의 초여름

in #kr7 years ago (edited)

말할수없는.jpg

스무 살은 아련한 기억들이 모여드는 물웅덩이와 같다.
가끔 이별을 노래한 음악을 듣고 눈을 감으면, 새롭게 맞이한 봄, 대학 캠퍼스, 엎드려 자던 도서관 칸막이 책상, 지금은 기억에만 남은 사람들의 눈빛이 햇살처럼 마음에 쏟아져 내린다.


노래를 들으며 읽으면 더 좋겠다는 제안으로 노래를 위로 올렸습니다. 음악과 함께 읽으세요

악동뮤지션, <오랜 날 오랜 밤>


함께 과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핑계로 주말에 만나 도서관에서 나란히 엎드려 자던 같은 과 여사친이 있었다. 삐삐로 약속을 잡고 메시지를 전달하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삐삐 번호는 내가 외우고 있던 유일한 번호였다. 함께 있으면 놀랍도록 편안해서, 1학년 1학기가 반 정도 지났을 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로를 찾는 사이가 되었다.

그 애와의 기억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초록빛으로 물든다.
시험 기간에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나왔는데, 뜬금없이 센치해진 그녀는 나를 편백나무가 우거진 화단 잔디밭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살면서 겪은 아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살짝 눈물도 내비쳤던 것 같다. 4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나 겪은 설움과 한이 어찌나 많았던지.

캠퍼스.jpg

그 당시 우리는, 적어도 나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뿌리 깊은 아픔을 말한다는 건 상대방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거라고 이해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의 비밀을 공유했다. 나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찔끔 흘렸던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고, 그런 아픔을 간직한 나를 속 깊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심각하고 진지했는지 웃음이 나지만, 우리 둘은 참 잘 맞는 친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대화는 어둑해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가로등이 켜졌고, 풀벌레가 울었다. 시험공부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돌아보면, 그 몇 시간의 대화는 그 해 여름의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다른 도시 출신이던 그 애는 여름방학이 지나고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4남매 중 셋째 딸을 객지에서 공부 시킬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을 거라는 짐작은 간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고, 그 애는 여름방학을 고향집에서 보내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나는 그 애의 짐을 들어주며 동행했다. 터미널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 애의 표정이 유독 어두웠다. 늘 밝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던 아이인데 그런 표정은 좀 생소했다.

아마도 그때 그 애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학기의 무수한 추억을 남기고 우린 끝내 친구로 남았다.

그 애가 돌아오지 못한 자리를 느낄 때마다 난 그때 그 잔디밭을 떠올렸다. 우리가 깊이 마음을 나누던, 우주에서 유일하게 서로가 위안이 되던 그 순간을 말이다. 잔디밭 옆 가로등이 켜지자 그 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웃으면 작아지던 눈과 살짝 나오던 덧니도 하얗게 빛났다. 바람이 불어 우리의 코에 여름의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대화는 그칠 줄을 몰랐고, 한참을 머무르다 우린 학교 앞 식당에 볶음밥을 먹으러 갔다.

가로등2.jpg

여름이 지나고 2학기가 끝날 때까지 우린 간간이 삐삐를 주고받다가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을 끊게 되었다. 마침내 우린 서로 기억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난 그때의 기억을 붙잡고 시 한편을 적었다.


스무 살의 초여름

스무 살의 초여름, 저녁달을 기억한다.

초록의 잔디는 막 켜진 가로등을 피해
수줍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가, 갸, 거, 겨,
태초에 배우던 말들이 오가듯,
다 자라지 못한 말들이 서로에게 가 닿았다.
우리 안으로 들어온 말들은,
순식간에 자라서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여름이 무르익고 있었고, 우린 어렸다.
다시 오지 못할 시간이란 걸, 그땐 몰랐다.


올해도 이제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있으니, 결산 차원에서 올 한 해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를 소개했습니다. (위에) 눈을 감고 들으면 이 노래는 저를 그곳으로 이끕니다. 스무 살 초여름, 태초의 말들이 오고가던 그 푸른 잔디위로-
좋은 연말되세요!^^


Sort: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방문과 격려 감사합니다!^^

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Thank you^^

기억의 습작은 진부할까요? ("건축학개론에 가려질라나?ㅋ)
저는 그 순간을 역사적 순간이라 칭해요
제 인생의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순간!
카르페디엠~ YOLO~ 뭐라 이름 붙여도 상관없을 그 순간!
시간이 흐르면서 망각이란 축복을 받고 살지만 그 역사적 순간만큼은 어제 일인양 또렷하게 남아 있는것도 참 기적같은 일인거 같구요~
문득문득 찾아오는 그 기억들은 참 아련하면서도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조금전과는 다른세상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하지요~
종종 너무 센치해져서 탈이랄까요 :)
주말 아침을 kyslmate님 글로 시작하니 오늘 하루 좋은일이 있을거 같네요! 시나브로 잠에서 깨 눈을 뜨면 kyslmate님 새글을 찾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인생의 역사적 순간! 적절한 명명인 거 같습니다^^ 누구나에게 있는 그런 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겠죠~~
문득문득 지칠 때 잠시 돌아가서 현실의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으니까요.
매일 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ryuie님 때문에라도 매일 열심히 글을 써야할 것 같네요.
1일 1글을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혹여 지치는 순간이 오면 이 댓글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행복한 밤 되세요!ㅎ

어리지만 풋풋했던 그 때가 떠오르네요-
정말 소중했던,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이네요...ㅜㅠ

신농님 사진 보면 지금도 어리고 풋풋해 보이시는데요?^^ 소중했던 기억이 지나고 나면 힘들 때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ㅎ

으으, 풀보팅하고싶은데 뉴비지원이벤트때문에 참습니다 ㅠㅠ
역시나 엄청난 글솜씨네요!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것으로도 감사합니다^^ 원하시던 역할을 하실 수 있게 된 것 축하드려요! 한동안 뉴비 지원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ㅎ

Congratulations @kyslmate! You have completed some achievement on Steemit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Award for the number of posts published

Click on any badge to view your own Board of Honor on SteemitBoard.
For more information about SteemitBoard, click here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By upvoting this notification, you can help all Steemit users. Learn how here!

글을 참 잘 쓰시네요. 팔로우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저도 팔로우할게요. 자주 뵈어요!

이것은 정말로 흥미 롭습니다. 우수한 사진. 나는 그 그림들을 좋아한다. 이 게시물은 좋은 콘텐츠로 내 얼굴에 미소를지었습니다. 놀랄 만한.

Thank you for your coment. ^^

추억을 곱씹으며 풀어낸 글에서
청춘 특유의 달콤하지만 쌉쌀하기도한 감정을 느낍니다.

노래를 추천해서 듣고 있는데 처음 도입부에서
'반짝 반짝 작은별'을 연상케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친숙하게 와닿네요

이제는 기억의 저편에서만
볼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 때 그 시절...

잘 보고 갑니다.

네. 청춘은 생각하면 달콤 쌉싸름하죠ㅎ
그 나이 대엔 다 저마다 아련한 추억이 있지요!
글과 노래를 통해 잠시나마 그 시절로 돌아가셨다면 의미있는 포스팅이 된거 같네요^^

시랑 노래가 모든 내용을 압축해주네요ㅠㅠ

네 때론 백마디 말보다 음악 하나가 더 많은 걸 전해줄 때가 있죠^^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6
JST 0.030
BTC 68348.76
ETH 2644.95
USDT 1.00
SBD 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