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review] 빨간머리, 고아라는 것만 앤과 같은 소녀에 대하여, <퀸스 갬빗>
화제의 영화나 드라마, 책을 뜨거울 때 보지 않고 미뤄두었다가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 보는 일이 많다. 좋은 건 시간이 지나서도 좋을 거라는 생각도 있고,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조금 지겨워져서 오히려 밀쳐놓게 되기도 한다.
2020년 넷플릭스 최고의 드라마라는 <퀸스 갬빗>도 반발심으로 밀어두었던 경우다. 지난 주에 드디어 정주행했다. 일주일이 지나가는데도 머릿속에 <퀸스 갬빗>의 주인공 베스 허먼(안야 테일러 조이)이 체스판 앞에서 손등을 턱에 갖다대며 웃는듯 마는듯 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실제 인물인 것처럼,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캐릭터가 드라마 전체를 장악했고, 그녀가 지나간 내 마음에 두 줄의 깊은 마차 바퀴가 남은 것 같다.
빨간머리에 고아 소녀라는 점에서 앤 셜리와 설정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앤 셜리의 시그니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다스러움과 감정 표현이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캐릭터가 바로 베스 허먼이다. 베스 허먼은 고독, 그리움, 안에서 들끓고 있는 열정 따위의 감정을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안쓰럽고, 그 감정들이 묵직하게 와 닿는다.
냉전 시대의 체스계는 소련의 챔피언이 오랫동안 왕좌에 앉아 있다. 그 당시의 분위기로 봤을 땐, 소련의 챔피언이라고 하면 악의 화신급 빌런으로 그릴 법도 하다. 원작 소설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몰라도 드라마에선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주인공이 모스크바 대회에 갔을 때, 그녀가 꺾은 플레이어중에 체스계의 레전드인 백발 노인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릴 적에 그의 경기를 보고 공부했다며 존경을 보내고, 그 소련 선수도 그녀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건넨다. 결국 그녀가 넘어야 할 빌런은 소련 선수가 아니다. 그녀 자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넘어서야 하는 대상이 베스 허먼 자신임을 끈질기게 그려낸 점이 좋았다.
누군가에겐 2020년 최고의 드라마였을 <퀸스 갬빗>은, 내겐 2021년 최고의 드라마가 될 것 같다. 내가 뭘 넘어서야 할지, 그 목표를 엉뚱한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있는 건 아닌지, 베스 허먼은 그 눈빛으로 내게 묻는다. 빌런은 없다. 다만 길을 잃은 내가 있을 뿐.
P.s : 예전에 영화 리뷰 올릴 때, AAA에서 올렸었다. 지금은 방법도 다 까먹고, AAA코인도 방치되고 있다. 그걸 지금 팔수는 있는 것인지. 아득한 옛일 같다.
정말 멋진 표현 같아요.
가슴에 콕 새겨지는 말이네요. ^^
저도 정말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어요. 체스에 급격한 관심이 생겼던 ㅎㅎㅎ
이런 깊은 리뷰를 읽으니 너무 감동입니다. ^^
이 드라마땜에 체스 배우는 사람 늘었다고 하더라구요ㅎㅎ 바람소리님은 자막없이 드라마를 보실지도 모르겠네요^^ 리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