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중고서점 시리즈] 중고의 기쁨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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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를 찾는 근본적인 이유는 가격 때문이다. 물건이 필요하긴 한데, 새 것을 살 여력이 안 되거나, 새 것을 살 시점이 아니거나 할 때 중고를 찾는다. 때로는 처음 써보는 그 물건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중고품을 먼저 사서 써보기도 한다. 그런 저런 이유로 많은 ‘중고’들이 내 삶을 거쳐 갔다.

중고 자전거

 나의 중고 인생에 있어 최초의 기쁨은, 중고 자전거였다. 자전거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던 8살 때,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조르던 나를 데리고 동네 자전거포에 가셨다. 지금 자전거를 사는 건 좀 이르니, 자전거를 한 번 빌려서 타보라고 했다. 당시 동네 자전거포는 자전거 수리도 하고, 새 자전거뿐만 아니라 중고 자전거도 팔고, 돈을 받고 자전거를 대여해주기도 했다. 구멍가게 규모였지만, 자전거에 관한 한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빌리러 가면서, 난 이미 내게 자전거 한 대가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8살의 나이에도, 난 엄마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직접 보면 엄마는 내게 자전거를 사주고 싶은 마음이 동할 거라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딱! 8년을 지냈는데 그 정도도 모를까.

 자전거포 아저씨가 내 준 파란색 중고 자전거는, 뒷좌석까지 이어진 긴 안장에 보조 바퀴가 붙어 있었다. 난 한껏 들뜬 표정으로 자전거를 바라보았다. 그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역시 엄마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이거 사려면 가격이 얼마예요?” 내가 예상하던 엄마의 반응이 나왔다. 그 길로 난 처음으로 파란색 자전거를 가지게 되었다.

 그걸 타고 동네 구석구석을 누볐다. 반 아이들과 약속을 해서 함께 라이딩을 즐기기도 했다. 너덧 명의 친구들은 집결 장소에 모였다가 해가 질 때까지 가까운 동네를 돌아다녔다. 반 아이들의 집을 아는 애들이 그 집 앞을 지날 때 우리에게 알려주면, 우린 그 집에 사는 친구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지나갔다. 그렇게 부른 아이 중에 내 생애 첫 연정을 품었던 아이도 있었다. 단지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를 뿐이었는데 가슴이 말로 형용 못할 정도로 벅차올랐다.

 이렇게 파란색 중고 자전거는 내 영역을 비약적으로 확장시켜 주었다. 하지만 중고의 한계는 있었다. 수시로 체인이 풀렸다. 한껏 속도를 올려야 하는 시점에 터덕, 하면서 페달이 헛돌곤 했다. 그 덕에 체인을 다시 끼는 방법은 터득했지만, 언제 체인이 빠질지 불안 불안했다. 중2때 새 자전거를 사기 전까지, 중고 자전거 하나를 더 거쳤는데 그것 역시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체인이 빠질 때면, 자전거가 “중고 값어치는 여기까지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중고 냉장고

 대학 때 자취를 시작하면서 원룸에 살림살이들을 장만해야 했다. 2년 밖에 남지 않은 대학 생활을 고려했을 때, 새 것을 사는 건 애매해서 죄다 중고로 구입했다. 냉장고, 세탁기, 책상, 의자… 아, 중고로 구입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한 자짜리 옷장이었다. 그건 원룸 앞에 누가 버린 걸 들고 왔다.

 자취 생활 6개월이 다 되어갈 무렵, 중고로 산 걸 크게 후회한 물건이 있었는데 바로 냉장고다. 중고라서 지저분하다든가, 에너지 효율이 떨어진다든지 하는 건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본연의 기능인 냉각이 잘 되지 않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냉장고는 어디 합선된 건 아닐까 싶을 만큼 큰 모터 소음을 내다가 하이브리드 자동차처럼 갑자기 조용해졌다. 1시간동안 소리가 나지 않아서 문을 열면 퀴퀴한 음식 냄새가 얼굴로 훅 끼쳐왔다. 수리 기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더운 공기가 들어가서 모터 쪽에 물이 스며들고 다시 냉각이 되면 모터가 얼어서 멈추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냉장고 문을 열지 마세요.”
 “냉장고 문을…요?”
 “이 냉장고는 오래돼서 예민합니다. 문을 자주 열수록 자주 멈출 겁니다.”
 “또 멈추면 어쩌죠?”
 “아예 코드를 뽑고 몇 시간 기다리세요. 모터를 멈추게 한 성애까지 녹고 나면 다시 돌아갈 겁니다.”
 “그럼 음식은…요?”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이렇게 환자 같은 냉장고를 들인 겁니까?”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들인 것은 일꾼이 아니라 환자였다는 것을. 바깥의 더운 공기를 못 이기는 냉장고라니! 최대한 냉장고를 열지 않으려면, 물을 밖에 둬서 찬물은 포기하고, 냉장고에 볼 일이 생각날 때마다 적어놓고 서너 개가 쌓이면 한 번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냉장고는 또 멈출 것이다. 이건 음식과 반찬을 수시로 내다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음식의 보관 기간이 짧아지므로 어쩌면 식중독의 위험에선 더 멀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내 이런 걸 놓고 긍정적인 사고를 시도하는 나 자신이 오히려 얄미웠다. 그 후 냉장고를 사야 할 때면 무조건 새 걸 샀다. 그리고 주변에 중고 냉장고를 사려는 사람들을 뜯어 말렸다. 그들은 내 눈에서 중고 냉장고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발견했을 것이다.

*

 중고 냉장고, 중고 컴퓨터, 중고 TV, 중고 차, 중고 책상, 중고 자전거, 중고 신인, 중고 신랑… 내가 만난 ‘중고’가 붙은 것들 중에서 실망감을 주지 않은 건 중고 서점뿐이다. 중고 서점은 단순히 싼 가격이 주는 기쁨을 가뿐히 뛰어 넘어 그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그 곳은 내가 즐기는 게임의 장이며, 늘 가고 싶은 여행지이며, 내가 꿈꾸는 미래가 책장에 꽂혀 있는 장소다.

 중고 서점은 수많은 책이 들어오고, 또 나간다. 책이 회전하는 체인은 빠지거나 멈추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문을 열고 오가도 적절한 냉기가 유지되며 오래된 책들도 신선하게 보관한다. 중고 서점은 오늘도 제 기능을 다한다. ‘중고’라는 겸손한 간판을 달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P.S.

 제가 무척 좋아하는 중고서점에 대한 가벼운 에세이를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힘을 빼고 큰 펀치보단 가볍게 잽을 날리며 경쾌한 스탭으로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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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중고시리즈 너무 재미있어요. 가벼운 잽으로 쓰시는 에세이 환영합니다.
저의 최애템들은 거의 빈티지에요. 가방, 책, 반지 등.. 사람의 손때가 묻어있는 그리운 느낌은 안써본 사람은 모르는것 같아요. 특히나 읽고 싶었던 책을 깨끗한 중고로 발견했을때, 원가의 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업어올때는 세상을 다 가진것만 같지요.

재밌게 보셨다니 기분 좋네요.ㅎㅎ
빈티지를 좋아하시는 레일라님이군요. 가방, 책, 반지.. 벼룩 시장을 무척 좋아하실 각인데요? 프랑스엔 벼룩 시장이 많이 열릴 거 같아요. 예전에 빈티지 물건 파는 거리 다녀오신 포스팅이 얼핏 기억이 나네요. 읽고 싶었던 책을 중고서점에서 딱 발견할 때의 그 희열은 정말 아는 사람만 알죠.^^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 벼룩시장이 안열리는데 봄에 슬슬 나올거에요. 주말마다 놀러 다니는 재미가 쏠쏠해요.

어느날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한 집 앞에 무더기로 나와있는 S급 책과 음반을 발견한적도 있어요.^^ 뜻밖의 경험이죠. 나에겐 더이상 쓸모없는 물건도 누군가에겐 보물이 될수 있다는것 참 신기해요.

우리 도시에도 진귀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는 벼룩 시장이 열렸으면 좋겠네요. 그럼 정말 주말마다 둘러볼 거 같아요.ㅎ
왠지 레일라님이 언젠가 벼룩시장에 좌판을 깐다면, 보물 같은 물건이 많이 나올 거 같아요. 진귀한 거 많이 소장하고 있지요?ㅋㅋ 그 집 앞 지날 때 저도 횡재 함 하고 싶네요.ㅋ

fur2002ks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fur2002ks님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ㅋㅋ(이벤트 발표/뻘짓 진행사항)

...ny skuld2000 parkname asinayo wisdomandjustice travelwalker kyslmatedmsqlc0303 girina79 hanwoo ravenkim naha marsswim gasigogi b...

오늘은 미션이 없네요 ㅎㅎㅎ

램프의 팥쥐님을 소환했어야 하는데 말이죠.ㅋㅋ

중고는 진짜 보는눈이 있어야될거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개봉해서 한번 사용한 물건

상태 A급

이라고 써진게 젤 위험함 ㅋㅋㅋㅋㅋㅋ

ㅋㅋㅋ 개봉해서 한 번 사용한 물건, 상태 A급..
순간 혹 했습니다.ㅜㅎㅎ 전 보는 눈이 없습니다...ㅋ

전 중고로 뭘 사본적도 팔아본적도 없어서 주위에 잘 사고 파는 사람들 보면 부러워요. 렌즈를 하나 사고 싶어서 사이트를 지켜보긴 하는데 찾는건 참 안 나오네요. ㅎㅎ

그나저나 중고신랑 무엇.

중고나라 애용하시나요.ㅎ 키워드 걸어놓으면, 그 물건 나오면 띠링띠링 알람옵니다. 렌즈 같은 건 중고로 사면 딱 좋을 만한 물건 같아요. 오래된다고 성능이 떨어지거나 더러워지는 게 아니니까요.^^
중고 신랑은 새 신랑의 반대.ㅋ

아.. ㅋㅋㅋㅋ 그런 중고 신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고나라는 안써봤고(한국에 언제 갈지..), 이곳에도 그런 비슷한게 있어서요. 그런데 키워드가 카메라 렌즈 까지밖에 안돼서 결국 수시로 직접 들어가봐야해요 -. -;;;;;

적절한 렌즈를 빨리 찾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ㅎㅎ
좋은 주말되세요!^^

아주 가끔 출판단지에 있는 중고서점에 가는데 그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주로 어떤 분야를 염두에 두고 책을 고르지만, 딱 맘에 드는 책을 고르기는 어렵더군요..ㅎㅎ

예전에 저도 출판단지내 중고서점 가봤어요. 규모는 크지 않았는데 인테리어가 꽤 환상적이더군요. 사진도 몇 컷 담아왔던걸로 기억합니다ㅎ

가볍고 경쾌한 글 좋아요. :)

저도 중고서점은 아니지만 used book sale을 애용하고 있어요.

외국 온라인중고책샵인 모양이네요ㅎ 갖고 싶은 책은 많은데 새 책으론 감당이 안 되지요. ^^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늘 감사해유~ㅎ

저희집 냉장고는 중고입니다. ㅎㅎㅎㅎㅎ

아직 문제 없다면, 운이 좋으신 겁니다.ㅋㅋㅋ

가벼운 잽에 넉다운되게 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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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잽잽!! 퀵퀵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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