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history> 희대의 기회주의자 박정희 제 2부 제3공화국과 한일협정

in #kr6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근현대사를 포스팅하고 있는 잠마루 @jammaru31 입니다~

오늘은 다행이 퇴근후에 시간이 되서 박정희 2부를 쓸수가 있네요 ㅎㅎ

장기집권을 하는동안 크게다루어야하는 인물들 과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뭐 부터 써야 할지 고민이 되네요.

필력이 너무나 부족하지만 재미있게 그리고 유익하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박정희 2부 제3공화국과 한일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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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공화국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대한민국을 북학으로부터 수호 해야 하는 군인들중 일부분이 자신들의 부대를 반대반향인 서울을 향하고 진군합니다.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자신이 포섭했던 육사 5기생, 8기생과 만주군의 인맥들을 동원해 군사쿠테타를 일으킵니다.

정변 후 2틀 후인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창설해 초대 위원장으로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을 취임시킵니다. 이에 카르멜수도원에 피신해 있던 장면총리는 하야를 선언하였고 다시 2틀뒤인 5월 20일 박정희는 의장에 취임이 되고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합니다.

1962년 3월 22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은 사퇴하고 박정희가 권한대행을 맡으면 사실상 제2공화국은 그 짧은 끝을 냈고 1963년 12월 17일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서 제 3공화국이 시작이 됩니다.

대통령 권한대행 당시에도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이라는 말되 안되는 짓을 강행합니다. 이병철등 15명을 구속하고 구속중이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하게 합니다. 이렇게 뺏은 재산으로 5.16 장학회를 설립하였고 언론장악을 시작했습니다. 권력대행부터 언론자유와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기 시작한거였죠.
권한 대행이 아닌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는 과연 언론과 사유재산권에 대한 그의 행동은 너무나도 뻔했습니다.

2. 한일협정

3공화국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일본에 어떤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한일협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3공화국 이전의 한일회담의 기조와 이후의 기조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입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 지기를 가장 바라는 나라는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막기 위한 기지로 일본의 재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3국 동맹입니다.
미국의 주도로 한일회담이 1952년부터 5.16 쿠데타 이전까지 총 5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간의 의견대립이 심해서 좀처럼 진전이 없었습니다.

바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피해배상에 대한 입장 차이 였죠.

  •   한국정부의 입장: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에 배상을 요구 할 수 없게 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 보상과 배상을 요구 할 수 있는 청구권을 요구 하였습니다.
    
  •   일본정부의 입장: 일본정부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건은 한국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어이가 없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한국정부에 오히려 일본이들이 두고온 공장, 철도등 적산산업에 대한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 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한일병합 조약의 무효를 요청하는 한국정부의 요청 또한 반대했습니다.
이렇듯 5차례 동안 열린 한일회담은 양 국가의 의견차이 때문에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한국정부의 일본에 대한 요구는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바로 경제를 살기 위한 자본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협정 체결을 위해서 기시 노부스케라는 A급 전범과 접촉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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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시 노부스케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표 보자면 기시 노부스케는 바로 현재 일본 총리를 하고 있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 입니다. A급 전범으로 일본의 패전 후에 처형당해야 될 인물이었지만 일본의 경제 부흥을 원하는 미군정에게 불기소 처분을 받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의 도움으로 정치에 진출하게 됩니다.
1961년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어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떠올리며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이다.
둘 다 만주국의 후예였기에 바로 통할 수 있었고 그 뒤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의 멘토가 됩니다.
기시 노부스케가 한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너무 나도 많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따로 포스팅을 통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당시의 한일협정문서가 2005년 공개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분노를 다시 한번 사게 되었죠.
박정희는 대일청구권 포기 말고도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 마져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5년간에 걸쳐서 일본기업들로 부터 본인이 소속되어있는 민주공화당의 총예산중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습니다. 당연히 당시 일본측 외교 라인은 만주인맥이었고요. 한나라의 대통령이라고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더욱 어이가 없는 박정희의 행보는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강제로 진압했다는 것입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내란선동죄로 몰았습니다. 군사쿠데타를 저지른 박정희가 말이죠.
이렇게 반대운동은 박정희의 탄압에 진압되었고 1965년 한일협정은 체결 되었습니다.
사죄와 배상을 재대로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양국의 모든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부속형정1조를 포함시켰습니다.

이 조항 때문에 지난 50년간 한국정부의 정당한 배상요구는 계속해서 발목을 잡히게 됩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과 사과도 이 조항을 근거로 극우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다른 전범 국가들의 경우 배상으로 인해서 2차 세계대전이후 큰 고초를 겪습니다.
너무 나도 당연한 일이었죠.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참극을 단지 물직적인 보상으로 끝낸다는 것은 엌지보면 너무 나도 미약한 처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 때문에 그 보상조차도 받지 못하고 맙니다.

그리고 아직도 매주 수요일 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안부 진상규명과 사고를 위해서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화가 너무 나네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다시 하번 한나라의 대통령이 었던 인물이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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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아마 본인의 재산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이용해먹은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아마 시일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라고 생각한 점도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절대로 잊으면 안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충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알게되니 정말 손떨리는 군요.

박정희 포스팅은 자료를 찾아보면서 받는 화가 너무 많습니다

모르는 게 마음은 편할텐데.
또 모를 수만 없는 거죠.

한일협정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달러화를 제공받거나 원조, 차관 등을 제공받았는데 그 명목이 바로 '독립 축하금'이었습니다. 애초에 배상이란 의미나 명분따위는 묵살해버린지 오래죠.

실제로 그 협정 때문에 경제가 발전된 건 사실이지만 그 반대급부 때문에 지금도 난항을 겪고 있는 위안부 문제는 사실상 평행선 그 자체로 달려가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ㅜㅜ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협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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