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을 내걸고 죽을 끓인 세종과 죽 화상흉터치료

in #kr6 years ago

가마솥을 내걸고 죽을 끓인 세종과 죽 화상흉터치료

이도(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안대군 이방원이 왕세자가 되면서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들을 찾아내어 독서를 계속하였다.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孝寧君)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대광보국 충녕대군(大匡輔國 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李禔)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8년에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7]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하였다.[2]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뒤인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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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무려 7년간이나 혹독한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 농사가 전부였던 백성들의 고통이 날로 늘어가자 세종은 암담하기만 했다. 세종은 궁여지책으로 육조관아의 큰길(현 광화문 거리)에 가마솥을 내걸고 죽을 끓여 도성안 백성들을 먹이게 했다. 광경을 지켜보다 참담한 심정으로 경복궁을 향해 걸음을 돌린 세종은 경회루 근처에 이르자 뒤를 따르던 신료들을 향해 시름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성들이 끼니가 없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 어찌 호화로운 침전에 누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세종은 경회루 동쪽에 오래된 재목으로 별실 두 칸을 짓게 했다. 말이 별실이지 기둥 밑에 괴는 돌인 주추도 쓰지 않고 외벽도 널빤지로만 두르게 했다. 모든 장식은 직접 지시하여 최소한 검소하게 꾸몄다. 그리고 세종은 정전이 아닌 이 별실에서 기거했다.
조선왕들의 생로병사, 강영민 지음, BF북스, 페이지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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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나라 탕왕은 7년간이나 가뭄이 계속되자 ‘희생양’을 자처해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른 뒤 희생(제물)의 모양새를 갖추고는 뽕밭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아첨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했으며, 뇌물이 성행해 백성이 곤궁에 빠졌다’는 등 자신의 6가지 잘못을 거론하며 자책했다. 사문유취(事文類聚)에 나오는 탕왕의 ‘상림육책(桑林六責)’인데 탕왕이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곧 단비가 쏟아졌다.
사실 탕왕이 성군으로 불리는 것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역사를 장악했기 때문일수도 있는데 역사는 권력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천인상응설에 따르면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가뭄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세종도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세종은 죽을 만들어 빈민을 구휼했는데 죽을 쑤다가 화상을 입기 쉽다. 죽을 타지 않게 계속 저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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