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다산독본, 파란2, 정약용, 두하늘, 천주와 정조, 금등지서, 화성건설, 채제공, 정감록, 화성시,유슈, 이벽전, 사도세자 천주교인, 정조 노아 천주교인, 칠극, 성경직해

in #kr3 years ago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2, 정약용, 두하늘, 천주와 정조, 금등지서, 화성건설, 채제공, 정감록, 화성시,유슈, 이벽전, 사도세자 천주교인, 정조 노아 천주교인, 칠극, 성경직해

정민의 다산독본(茶山讀本)이란?
정민의 다산독본은 다산 정약용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들여다봅니다. 청년 시절 18년, 강진 유배 18년, 해배 후 18년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인간 다산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다산의 사람됨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작업 과정, 절망과 고통에 처한 인간의 고뇌와 상황 대처 능력, 사각지대에 놓인 자료의 발굴에서부터 그의 인간적 결점과 그늘까지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살아 있는 다산 평전입니다.


  1. ‘청년 다산’에 관한 놀랍도록 낯선 이야기

“청년 다산에 관한 책을 쓰면서 나는 지금까지 반쪽 다산(강진 시절의 다산)만 보았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다산을 본 적이 없었어요.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내가 그동안 반 토막만 봤음을…….”

젊은 날의 다산에 대한 글을 집필하면서 정민 교수가 긴 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다산 증언첩』 등 600∼800여 쪽에 이르는 책을 출간하고, 『미쳐야 미친다』, 『삶을 바꾼 만남』, 『다산의 제자 교육법』 등 18세기 지식인 그리고 다산의 공부와 교육을 오늘의 삶과 연결해 들여다본 정민 교수의 짧은 소회는 예사롭지 않다.
다산은 1930년대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부터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민 교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호출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까지는 애민정신과 실학사상가로, 2000년대 이후에는 지식경영자(편집자)로서 재조명되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사유한 다산은 강진 유배기에 이뤄낸 수많은 저작과 당시 삶으로 구성된 다산이었다. 완성된 인간을 밑그림으로, 무결한 글로 다산의 윤곽을 완전하게 그려냈다. 흠결 하나 없는 인간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우리가 겪는 갈등과 고뇌와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시간은 없었던 것일까? 다산의 청년 시절은 벗들과의 우정과 배신, 유학과 서학 사이에서의 번민, 정조의 총애와 천주를 향한 믿음, 형님들의 죽음과 유배, 숱한 친지의 순교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마다 다산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던 것일까?
정민 교수는 맥락이 맞지 않았던 다산의 글들을 의심하고, 행간이 건네는 말을 들었다. 다산이 직접 쓴 글과 로마교황청 문서 그리고 조선 천주교 관련 연구 기록 세 가지 사료를 ‘삶’이라는 조명으로 비추었다. 학술 영역에서 다룰 수 없었던, 그러나 한 사람 생에서 절대적이고도 중요했을 주변 사건들을 통해 다산을 생생히 되살려냈다. 삶의 자취를 따라 알려지지 않은 사료를 발굴하고 이를 치밀하게 조직해서, 다산의 청년기를 곡진하게 펼쳐냈다. 위대성만 부각하기보다 뾰족하고 거침없으며 모순적 내면까지 솔직하고 세밀하게 드러내, 살아 숨 쉬는 ‘인간 다산’을 그렸다. 그 결과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전 2권)라는 새로운 다산 평전이 탄생했다.

나는 박제화된 성인 다산을 만들 생각이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이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우리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의 문집은 사료로 치면 오염된 부분이 적지 않다. 다산은 자기 검열을 통해 불리하거나 불편한 내용은 삭제하고, 일관성 확보를 위해 많은 글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기록과 겹쳐보자 다산이 썼다가 지웠던 부분들이 얼핏 드러났다. 이 책에서는 다산이 지웠음직한 자료를, 날것 그대로 맥락 없이 남겨진 다른 자료와 겹쳐 읽음으로써 지워진 부분을 복원해보려고 애를 썼다. …… 1938년 최익한은 신문지상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란 글을 65회에 걸쳐 연재했다. 다산 저작과 사유의 전모를 최초로 드러낸 기념비적 글로,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 일이다. 그때 그가 『여유당전서』, 즉 ‘다산의 책’을 꼼꼼히 읽었다면, 나는 다산의 책이 아닌 ‘다산이라는 책’을 읽고 싶다. …… 다산은 격랑의 한 시대를 앙가슴으로 부딪치며 살았다. 후학들은 그에게서 완전무결한 지성을 보려 하고, 일말의 흠집조차 용인치 않으려 든다. 세상에 그런 인간은 없다. ― 「글을 열며」에서

  1. ‘청년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

10∼30대 젊은 다산의 시간은 정조와 함께한 18년, 동시에 천주와 만난 18년이었다. 그간 국학에서는 다산이 신자였다가 배교한 뒤 유학자로 돌아왔다고 했으며, 천주교 측에서는 만년에 회개하여 신자로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천주교 신앙은 일반적 범위를 훨씬 상회하는 심각한 것이었다. 정민 교수는 ‘전부냐 전무냐’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다산에게 영향을 끼친 정조의 목소리 한 줄과 천주의 목소리 한 줄을 나선형으로 엮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면의 안쪽과 바깥쪽의 또 다른 면을 보면서 다산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정조와 천주교는 젊은 날 다산의 두 하늘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천주교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요 족쇄였다. 다산은 온몸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정조 또한 다산의 삶을 붙들어 맨 또 다른 굴레다. 수험생 시절부터 정조는 다산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깊이 아꼈다. 정조는 천주교로 계속 문제의 중심에 선 다산을 끝까지 감싸주며 곁에 두었다. 임금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다산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천주교를 떠났다. 정조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다산은 진작에 적당에게 끌려가 죽었을 사람이었다. ― 「글을 열며」에서

정조가 다산과 이학규에게 『어정규장전운』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켰다. 책이 완성되어 올라갔다. 임금이 보니 ‘부(父)’ 자의 풀이에 ‘시생기(始生己)’란 말이 나왔다. 시생기란 처음 나를 낳아준 분이란 뜻이다.
정조가 불쑥 물었다. “이 뜻풀이는 어느 책에 나오는 것이냐?”
천주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처음 나를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교리서 설명 중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이 문제로 신하들 사이에 『규장전운』을 훼판해야 한다는 비난이 비등했지만 정조는 애써 무시했다.
한번은 ‘홍수’를 제목으로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한 일이 있었다. 다산이 올린 응제시 중에 놀랍게도 ‘나아방주(?亞方舟)’의 일, 즉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인용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방주의 일은 어느 책에 나오느냐?”
다산이 대답했다. “신이 전하를 모시고 읽을 적에 그 책에서 이 뜻을 보았나이다.”
시생기와 노아의 방주는 모두 천주교 서적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정조 또한 그 책을 다산과 함께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1권 151~152쪽,「다산과 천주교」에서

  1. 세상을 바꾸고자 한 다산의 생각은 어떻게 잉태되었을까

다산은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했고, 10대 후반에는 서학(과학기술·사상·종교)을 만났으며, 20대 초반 정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다산에게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이 가득했고, ‘조선,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하는 자기만의 비전을 품었다.
세상을 바꾸려고 애쓴 한 사람의 생각은 어떻게 잉태되었을까? 20대에 과거 급제 후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구체화하려 했던 기획들은, 실현의 욕망이 좌절되고 18년 동안 강진에 유배된 동안 이론화되어 ‘다산학’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청년 시절 다산은 정조의 많은 기대와 사랑을 받았다. 다산은 정조의 국가 미래 구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를 잡고 싶으나 힘이 없었고, 저들과 공존하려면 견제 세력을 길러야 했다. 그 핵심 인물이 채제공·이가환·정약용 트로이카였다. 정조는 세 사람을 작심하고 기르기 위해 인큐베이팅을 시작했고, 문제가 생기면 계속 덮어주며 엄호했다. 이들이 잘 커야 노론 벽파의 전횡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 3인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고자 했다.

젊은 날의 다산은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다. 그는 벼슬길에 오른 이후 채제공 사단의 참모와 돌격 대장 역할을 도맡았다. 그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당시 복잡한 정쟁의 전면에서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가려운 데를 먼저 긁었고, 행동 뒤에는 반드시 결과를 얻어냈다. 채제공이든 그를 이용해 정권의 무게중심을 남인 쪽으로 옮겨 오려던 정조에게든 다산은 간이 딱 맞았다. 다산은 이쁜 짓만 골라서 했다. 노론이 남인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이진동을 해치려 했던 음모는, 다산의 구출로 인해 긁어 부스럼이 되어 정국의 주도권을 남인에게 넘겨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 1권 294∼295쪽, 「이진동 구출 작전」에서

  1. 다산은 신부였다

다산에게 서학, 즉 천주교는 평생 헤어날 수 없었던 굴레였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과 확산, 그리고 참혹한 박해의 과정에서 다산은 늘 한복판에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 창립 주역인 이벽은 큰형수의 동생이었고,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 천주교회 창설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이승훈은 누나의 남편이었다. 형님인 정약전과 정약전의 스승 권철신, 권일신 형제도 초기 교회 창립의 핵심 주역이었다. 형 정약종은 평신도 대표였다.
다산은 천주교에 관한 한 어떻게 하더라도 헤어날 수 없게 깊이 얽혀 있었다. 그는 이승훈에게 자청하여 세례를 받아 약망(若望) 즉 요한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한때 과거 시험공부도 팽개친 채 여럿이 모여 천주교 교리서를 공부하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명례방의 종교 집회에 참석해 적발된 일도 있었다. 자식들이 천주학에 깊이 빠진 것을 뒤늦게 안 아버지 정재원이 곁에 두고 철통 감시까지 했어도 다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정조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배교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신앙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산이 천주교 활동에 한창 열을 올렸던 1785년과 1786년, 그리고 26세가 되던 1787년까지 3년간 『사암연보』의 기사를 보면 성균관 유생으로 각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밖에 없다. 천주교 관련 사실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연보 속 다산은 공부밖에 모르던,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정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모범적인 수험생일 뿐이었다. 추조적발사건은 물론, 이벽의 죽음조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 1786년 가을에는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면서 각 지역의 신자들을 관리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역할을 담당할 열 명의 신부를 이승훈이 직접 임명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인 없이 자기들끼리 임의로 신부를 임명하면서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를 교회사 용어로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 하는데, 이때 가假는 ‘가짜’가 아닌 ‘임시’라는 뜻이다. …… 1786년 가을, 신부를 결정하던 모임에는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형제가 참여했다. 임명한 신부가 10인이라 했는데, 확인된 명단은 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 5인뿐이다. 별도의 기록에 홍낙민과 최 야고보가 더 보인다.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3인은 누구일까? 적어도이 중 두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이다. 두 사람은 조선 교회의 출범 당시부터 핵심 중 핵심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어째서 빠졌을까? 다블뤼나 달레가 애초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이 기록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은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자기 형제의 실명을 빼고 ‘그 밖의 여러 사람’ 속에 숨어버렸다.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은 이승훈이 임명한 10인의 신부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다산은 신부였다. ― 1권 215~218쪽, 「교회 재건과 10인의 신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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